나의 어린 시절은 어머니의 사랑은커녕 어머니란 이름도 마음껏 못 불러보고 성장한 천애 고아였다. 그래서 나의 친구들이 어머니라고 부르는 소리를 들으면 그렇게도 부러울 수가 없었다.
내가 고모 집에 있을 때 가을에 콩을 한 소쿠리 갖다 놓고 껍질을 벗기라고 하셨다. 나는 시키는 대로 긴 시간 동안 그 콩을 다 깠다. 그리고 나서 “고모! 콩 다 깠어요”라고 다정하게 불렀다.
그때에 고모는 “목소리도 듣기 싫어. 소름이 끼쳐. 고모라고 부르지도 마”라고 하면서 그 콩 껍질을 내게 던지는 것이었다. 참으로 슬펐다. 그때부터 고모라는 이름을 부르기가 두려웠다. 그리고 고모라고 불렀다가 매 맞으면 어떻게 할까 하고 걱정했기 때문이다. 그럴 때면 그리운 어머니 생각으로 미칠 것만 같았다.
아! 내가 그렇게도 다정하게 부르고 싶었던 ‘어머니’, 언제나 마음껏 불러볼 수 있을까?
그럴 수는 없다
1970년도에 일본, 미국, 캐나다 등 선진국을 방문하면서 주일에는 교회에 가서 말씀을 전하고 평일에는 친구들과 함께 시각장애인들을 위한 학교와 기관단체를 세밀하게 돌아보았다. 가는 곳마다 내가 느낀 것은 모두가 다 시각장애인들의 천국 같다는 것이다. 화려한 건물, 짜임새 있는 교육 프로그램, 더욱이 지도자들의 철저하고도 세밀한 지도력과 시각장애인들을 인격적으로 대하는 그 모습이야말로 참으로 아름답게 보이면서도 부럽기만 했다.
그들의 식사는 한국의 재벌 못지 않은 풍요롭고 영양가 높은 음식이었다. 언제나 우리나라 시각장애인들도 이렇게 잘살고 직업 훈련을 받아 사회에 나가 쓰임받을 수 있는 지도자가 될 수 있을까 하고 속으로부터 흐르는 눈물을 억제할 수 없었다.
그리고 나는 생각하기를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우리나라도 이렇게 될 날이 오겠지’ 하고 한 줄기의 희망을 걸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 기도드렸다.
나는 귀국해 시각장애인들을 위한 교회도 세우고 점자성경 찬송도 보급하고 적으나마 장학금을 젊은이들에게 지급해서 지도자를 길러야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생각을 그렇게 한 지 얼마의 세월이 지났다.
한 소녀의 간증이 어느 자선 음악회에서 펼쳐졌을 때 청중들은 눈물의 바다를 이루었다. 그 음악회에 참석한 고려합섬 장치혁 회장 내외분이 크게 감동을 받고 개안수술을 전문적으로 할 수 있는 병원을 세울 것을 굳혔다. 그리고 그 이듬해 뜻있는 실업인들이 모여 얼마의 기금을 마련하고 적합한 장소를 물색하게 되었다.
시각장애인들이 찾아오기 쉽도록 지하철역 부근의 교통이 편리한 곳으로 하자고 뜻을 모았다. 그런데 적합한 장소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최 장로가 끝까지 거부하는 것이었다.
1년을 끈 후에 자신의 땅을 팔아달라는 것이었다. 그 당시에 돈 기부를 해준 장 회장도 나도 반대했다. 최 장로를 추종하는 Y교회 이모씨와 합세해 결국은 최 장로의 강압적인 주장대로 밀려나고 말았다.
장 회장도 나도 포기했다. 왜냐하면 우리의 기대에 어긋났기 때문이다. 그들은 아무런 규제도 제약도 받지 않은 채 스스럼 없이 독단적으로 시가보다 최고의 값으로 매매와 매입을 한 형식을 취했다.
김선태 목사
<실로암안과병원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