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절 기간을 보내고 있다. 해마다 어김없이 다가오는 사순절이지만 금년의 사순절이 다른 의미로 다가오는 것은 오늘 우리가 처한 사회적 현실 때문인 것 같다. 주말마다 서울 도심을 분노와 증오심으로 편 가르고 내전을 치르듯 난리를 치는 오늘 우리의 수도 서울. 촛불의 신성한 의미도, 태극기의 숭고한 정신도 오직 자신들의 주장을 내세우기 위한 천박한 욕심의 도구로 변해 버린 이 어두운 역사의 한가운데서 사순절을 맞이하기 때문인 것 같다.
그 똑똑하다는 사람들이 몇몇 정치꾼들의 정권 유지를 위해 거짓으로 조작한, 팩트도 확실치 않은 거짓 선동에 꼭두각시 춤을 추는 현실을 보면서 인간의 한계를 보고 타락한 인간 문화의 절망을 본다.
여론과 통계를 조작해 자기 세를 불리며 미디어를 동원해 군중을 선동해 자파의 정치 영역을 넓히고 권력을 유지하려는 정치꾼들의 칼춤이 그렇고, 종북세력에 나라를 빼앗길 것 같은 불안과 두려움으로 안절부절못하는 보수 세력의 분노도 그렇지만, 더욱 안타까운 것은 이런 둑 터진 탁류에 휩쓸려 표류하는 순수한 정의감이나 순진한 애국시민들의 헛수고가 더 답답하다.
여론을 조작해 민심을 자기편으로 돌려 정치적 우위를 점하려는 불순한 세력들의 장단에 춤을 추는 군중들이 안타깝다. 조작한 여론으로 자신, 자당이 ‘민의’를 존중하고 국민을 주인으로 삼는 정도를 걷고 있는 정당이라고 힘주어 말한다. 그런가? 민심이 천심인가? 그렇다. 민심이 천심일 수 있다. 그러나 스스로 속지 말라. 민심이 천심일 수 있지만 ‘조작된 민심은 천심이 아니다’.
지금 우리는 사순절을 보내고 있다. 사순절이 되면 겉옷을 벗어 길에 깔고 손에 손에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호산나를 외치며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열광하던 군중들이, 곧바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바나바를 석방시켜 달라고 아우성을 치던 예루살렘 군중들의 무지몽매(無知蒙昧)가 생각된다.
그것이 그때 예루살렘의 여론이었고 그것이 그때 예루살렘의 민심(民心)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안다. 그것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제사장과 서기관들의 선동에 놀아난 허수아비 춤이었지, 천심(天心)은 아니었다. 그래서 민심을 따라 재판한 빌라도의 오판은 역사적 죄인의 대명사가 되었다. 민심과 천심을 분간할 지혜가 없었던 빌라도는 민심(여론)이 정의를 대변하는 줄 착각했다. 여론을 따르는 것이 진리를 따르는 것보다 유리한 출세 길인 줄 착각했다.
몇 년 더 누릴 권력의 달콤함에 영혼을 팔아 버린 것이다. 그의 오판은 하나님의 아들, 인류의 구세주를 십자가에 못 박는 무서운 범죄가 되었고 손을 씻는 그의 해프닝에도 그의 죄악이 면제되지 않았다. 그는 민심을 따르는 것이 사는 길이 아니라 진실, 하나님의 뜻(천심)을 따르는 길만이 사는 길임을 미처 깨닫지 못한 미련한 지도자였다.
우리가 이 거듭되는 혼란의 역사 가운데서 정신을 차려야 하는 것은 민심이 아니라 천심(하나님의 뜻)이다. 진정한 하나님의 뜻이다. 여론이 아니라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계 2:7)을 들어야 한다. 힘써 여호와를 알아야 한다(호 6:3). 세상 주관자들의 조작되어 오염된 여론이 아니라 이 땅에서 이루어질 하나님의 뜻(마 6:10)을 바로 알아야 한다.
그리고 이 시대의 교회는 그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선포하고 따르고 지켜야 한다. 사순절의 우리의 경건과 절제(節制)는 진지하게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진리의 길을 따라 결단하는 진지함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여론이나 사람들의 목소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래서 바른 판단으로 시대를 보고 많은 사람이 가는 넓은 길 보다는 진리를 따른 좁은 길(正道)을 걸어가야 한다. 바로 알고, 바로 믿고, 바로 살아야 한다.
이만규 목사
<신양교회 원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