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법(law)과 복음(good news)은 서로 충돌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서로를 드러내는 관계에 있다. 율법은 복음을 위해 존재하고, 복음은 율법을 통해 그 의미가 더욱 분명해진다.
율법은 하나님의 뜻이 외적으로 표현된 것으로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어졌다. 그러나 율법의 목적은 단순히 지켜서 구원을 얻으라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자신의 죄를 깨닫고 하나님께 구원을 구하도록 인도하는 데 있다. 사도 바울은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 3:20)고 말한다.
전통적으로 율법은 613개의 계명으로 정리되며, 그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십계명이다. 나머지 많은 규정들은 당시 이스라엘 사회와 종교적 삶 속에서 주어진 것들이다. 중요한 사실은 율법이 인간의 의를 증명하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오히려 인간이 스스로 의로울 수 없음을 드러내는 거울과 같은 역할을 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 안에서도 율법과 복음을 혼동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때로는 성경을 윤리적 교훈 중심으로만 해석하면서 복음의 핵심을 놓치기도 한다.
마태복음 18장에서 제자들은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라고 묻는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어린아이를 가운데 세우시며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인간이 자신의 힘과 공로로 천국에 이를 수 없음을 깨닫게 하는 강한 선언이기도 하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이 말씀을 단순히 어린아이처럼 순진한 태도를 가지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의미로 이해하기도 한다. 그렇게 되면 결국 행위로 구원을 얻는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성경이 말하는 구원은 인간의 행위가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주어지는 은혜이다.
누가복음 10장에 나오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역시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어떤 율법사가 예수님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묻는다. 예수님은 그에게 율법을 어떻게 이해하느냐고 되물으셨고, 그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말했다. 이에 예수님은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고 답하셨다.
이후 예수님께서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해 참된 이웃 사랑이 무엇인지 보여주셨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강도 만난 사람을 보고도 지나갔지만, 사마리아인은 그를 불쌍히 여겨 치료하고 돌보았다. 그리고 주막에 맡기며 끝까지 책임지겠다고 약속했다.
많은 사람들은 이 비유를 단순히 선행의 모범으로만 이해한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동시에 인간의 사랑이 얼마나 제한적인지를 보여준다. 율법은 일시적인 선행이나 간헐적인 사랑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완전하게 지켜져야 하기 때문이다.
야고보서 2장 10절은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하나를 범하면 모두 범한 자가 된다”고 말한다. 우리는 하나님을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해 사랑하라는 계명을 완전히 지키지 못한다. 이웃 사랑 역시 늘 부족하다. 결국 인간은 스스로 율법을 완성할 수 없는 존재임을 깨닫게 된다.
만일 인간의 선행으로 율법을 완성할 수 있다면 예수님의 십자가는 필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스스로 의인이 될 수 없기에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
따라서 성경을 해석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본문의 주제가 무엇인지 분별하는 일이다. 주제를 놓치고 주변의 이야기만 강조하면 말씀은 단순한 윤리 교훈으로 남고 복음의 핵심은 흐려질 수 있다.
성경은 끊임없이 율법과 복음을 함께 말한다. 율법은 인간의 죄와 한계를 드러내고, 복음은 그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의 길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이 둘을 분명히 구분해 이해해야 한다. 그럴 때 비로소 말씀 속에서 참된 복음의 의미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준묵 장로
<신길동교회 원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