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산정권의 신학교 강제 통합과 신앙 탄압
공산정권은 차제에 평양신학교를 어용 기관으로 삼으려고 감리교 성화신학교와 강제로 한 학교를 만드는 통폐합을 시도했다. 그러고 나서 학교 이름을 ‘기독교신학교’라 개명하고 공산정권의 어용 기구인 ‘기독교도 연맹’ 산하에 편입시켰다. 그리고 폐교조치에 앞서 먼저 두 신학교를 하나로 통합하고 신학생 수를 10분의 1로 감축하는 계획을 세웠다.
겨울방학에 들어가기 전 이러한 계획은 치밀하게 진행되었으며, 반동분자로 지목된 성화신학교 배덕영 교장의 제거가 먼저 진행되었다. 그다음에 두 신학교의 실무자를 불렀다. 장로회 신학교에서는 교장인 이성휘 목사가, 감리교 신학교에서는 교장이 없었기 때문에 교감인 박대선 목사가 출두했다.
그 자리에서 당국자의 물음은 “목사 없는 교회가 얼마나 되느냐?”였다. 이 목사가 대답하기를 약 50곳이라고 했더니 “그러면 50명의 교역자가 더 있으면 될 터인데 무엇 때문에 600명이나 학생을 모아놓고 실업자를 만들려 하는가?” 하면서 트집을 잡았다. 전국을 복음화하기 위해 600명이 결코 많은 수가 아니라고 설명했으나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장로교 신학교와 감리교 신학교를 하나로 통합함으로써 신학생 수를 적게 해 기독교 세력을 둔화시키려는 속셈이 있음을 뻔히 알면서도 두 목사는 하는 수 없이 서명했다.
이성휘 목사는 이러한 상황에 기독교 신학교의 교장 자리를 안 맡을 수가 없었다. 그는 무고한 신학생들의 희생을 막으며, 어떻게 해서든지 교직자들의 수난을 덜어보려는 생각으로 대속의 십자가를 자신의 등에 걸머졌다. 부교장은 성화신학교 이사장으로 있었던 송정근 목사에게 맡겨졌고, 교수진은 장로교와 감리교에서 한 사람씩으로 최지화 목사와 박대선 목사가 맡았다. 그러나 학교 운영의 실권은 기독교도 연맹 부총회장인 김응순 목사가 장악하고 마음대로 했다. 당시에 기독교도 연맹 총회장은 왕년의 부흥사 김익두 목사가 감투를 쓰고 있었다. 공산정권은 얼마 지나지 않아 이성휘 목사의 교장직을 빼앗아 기독교도 연맹 부위원장인 김응순 목사를 새 교장에 앉혔다.
1950년 신학기가 되어 학생들이 등교하고 보니 신학교 간판은 ‘조선기독교신학교’로 바뀌어 있었다. 공산 치하에서 완전히 어용화된 기독교도 연맹 주동자들이 이 신학교를 운영하면서 적색화 작업에 앞잡이 노릇을 했다.
신앙이 지조를 지켜야 한다는 신념을 가진 신학생들은 등교를 거부하고 몸을 피했다. 김광수 목사는 문자 그대로 지하로 숨어 들어가 국군이 북상해 올 때까지 간신히 생명을 유지했다. 그러다가 후에 월남할 기회가 있어 총회 신학교, 즉 오늘의 장로회신학대학교를 졸업했다.
기독교도 연맹의 간부들은 반동으로 지목된 신학생들의 명단을 공산당 정보기관에 넘겨주어 희생자가 속출했다.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었다. 학생들은 학교에 출석하기는 했으나 맥없이 수업을 받았고, 급기야 6·25 전쟁이 일어나면서 학교는 폐쇄되고 말았다.
이승하 목사
<해방교회 원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