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일 ③(James Scarth Gale)
연동교회 게일의 흉상을 대하면서 그를 알아보고자 하는 것은 단지 개인적인 관심 때문이 아니다.
그가 남긴 업적이 너무나 크고 깊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의 사역은 교회에만 머물지 않았다. 한국문화와 한국학 전반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고, 우리 문학과 문화를 서방 세계에 알리는 데에도 크게 기여했다. 이러한 사실이 일반에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는 점은 아쉬운 대목이다.
조선 말기까지 우리나라는 ‘은둔의 나라’로 불릴 만큼 스스로를 가두고 있었다. 외부 세계에 대해 철저히 방어적인 태도를 취한 결과, 점차 약해질 수밖에 없는 구조에 놓였다. 이는 본래 조선이 지니고 있던 문화와 의식의 발전을 가로막는 요인이 되었다.
이러한 조선을 깨우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이들이 초기 선교사들이었다. 그 가운데서도 한국문학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이를 서양에 소개하고, 동시에 서양 문학을 한국에 소개하는 데 탁월한 영향을 미친 인물이 바로 게일이다. 그가 한국 교회와 사회에 남긴 유산은 매우 귀중하며, 충분히 정리되고 재조명될 가치가 있다.
게일이 조선에 입국한 것은 1888년 12월로, 조선 선교 초기였다. 그는 이듬해부터 본격적인 사역을 시작하며 이 땅에 해야 할 일이 많음을 깨닫고 하나씩 준비해 나갔다.
그의 헌신과 수고는 오늘의 한국 교회와 대한민국이 문화강국으로 자리 잡기까지 보이지 않는 토대를 놓은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이는 단순한 주관적 판단이 아니라 기록과 사실을 통해 확인되는 부분이다.
초기 사역은 결코 쉽지 않았다. 조선인들에게 서양인은 낯선 존재였고, 그는 시행착오를 겪으며 자신의 사명을 찾아갔다.
무엇보다 중요한 과제는 조선어 습득과 조선의 문화, 그리고 사람을 이해하는 일이었다. 그는 이 일에 집중했고, 그 준비가 훗날 그의 사역을 가능하게 했다.
1889년 부산에서 약 1년간 머물며 오직 조선어 습득에 전념했다. 이 시기 그는 호주 최초 내한 선교사인 데이비스(Joseph Henry Davis)의 갑작스러운 별세와 장례 과정을 기록으로 남겼다. 이 기록은 부산·경남 지역 초기 교회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었으며, 그가 아니었다면 남겨지지 못했을 가능성도 있다.
게일은 조선의 역사와 문화에도 깊은 관심을 가졌다. 그는 한반도를 25차례나 여행하며 직접 보고 기록했다. 이는 조선을 이해하려는 그의 열정이 얼마나 컸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문학과 번역 사역에서도 그의 공헌은 두드러진다.
1895년 『천로역정』을 우리말로 번역한 것을 시작으로 『로빈슨 크루소』, 『나사렛 예수』(1927), 『성경요리문답』(1929) 등을 소개했다. 이 작품들은 문학이면서 동시에 복음을 전하는 통로가 되었으며, 특히 『천로역정』은 20세기 후반까지 교회에서 널리 읽혔다. 반대로 『구운몽』(1922), 『춘향전』 등을 영어로 번역해 서양에 소개함으로 한국 문화를 세계에 알리는 역할도 감당했다.
성경 번역 사역 역시 빼놓을 수 없다. 그는 언더우드가 조직한 조선어 성경번역위원회에 1890년부터 참여해 1923년까지 헌신했다. 마태복음과 에베소서 번역에 관여했으며, 위원회 활동과 별개로 개인 번역 작업도 지속했다. 이후 1925년 개인 번역 신구약성경을 출판하기에 이른다.
또한 그는 선교사들과 정보를 공유하고 조선을 세계에 알리기 위해 『The Korea Magazine』(1917~1919)을 발행했다.『Korean Sketch』,『The Vanguard』(1904), 『Korea in Transition』(1909), 『Korea Folk Tales』(1913), 『History of the Korean People』(1926) 등 다수의 저술은 오늘날 한국학 연구의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그가 남긴 저작은 영문서 9권, 한글 서적 30여 권에 이른다.
이 수치만으로도 그의 업적을 가늠할 수 있으며, 동서양에 끼친 영향 또한 매우 크다.
특히 주목할 부분은 우리말과 한글 발전에 대한 공헌이다. 한글이 국민의 문자로 자리 잡는 과정에서 선교사들의 역할은 결정적이었다.
이는 널리 알려져 있지 않지만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훈민정음’이 ‘한글’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 것 역시 선교사들과 주시경 선생의 노력 속에서 이루어진 일이다. 20세기 초에 이르러 우리 글의 정식 명칭으로 자리 잡게 되었고, 미션스쿨과 『독립신문』 등을 통해 사용이 확산되면서 체계화되었다. 이후 1897년 대한제국 선포와 함께 공식 문자로 자리하게 되었다.
게일은 주시경과 함께 조선어학회 활동에 참여하며 한글 체계 정립과 사전 편찬에도 기여했다. 언더우드가 1890년 편찬한 『한영·영한사전』을 기반으로, 그는 이를 발전시켜 1897년 『한영사전』을 출판했고, 이후 개정을 거쳐 1931년 『한영대사전』을 완성했다. 이는 한글 발전사에서 중요한 이정표로 평가된다.
아울러 1917년 한국음악연구회를 창립해 민속음악을 채보·보존하고, 전통 가락에 찬송가 가사를 붙이는 시도를 통해 교회 음악 발전에도 기여했다.
이처럼 게일이 남긴 업적을 종합해 볼 때, 그를 단지 연동교회 초대 목사로만 이해하는 것은 매우 협소한 시각이라 할 수 있다.
그의 삶과 사역은 한국 교회는 물론, 한국 문화와 학문 전반에 깊은 흔적을 남긴 귀중한 유산이다.
이종전 박사
인천기독교역사문화연구원 원장
개혁파신학연구소 소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