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4월에는 T.S. Eliot의 ‘황무지(荒蕪地/ The Waste Land / 1922)’란 434줄의 시귀 중 첫 구절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 기억과 욕망을 뒤섞고 / 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운다 / 겨울은 따뜻했지 / 대지를 망각의 눈으로 덮어주고 / 마른 구근들로 가냘픈 목숨을 이어 주었노라 ……” 1960년 4월 19일 자유당 정권의 장기집권 시도에 반대한 학생혁명으로 민주주의를 한발 앞당기는 정치 변혁을 이루었지만, 186명의 희생자와 6천26명의 부상자가 나온 사건이었다. 세계사적으로도 4월에 죽음을 맞이한 사람들이 있다. (1) 1968년 4월 4일 저녁, 미국 흑인 민권운동의 상징인 마틴 루터 킹(1929.1.15 ~ 1968.4.4) 목사가 미국 테네시주 멤피스의 로레인 모텔 306호 발코니에서 군중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갑자기 ‘탕’ 소리와 함께 쓰러졌다. 어디선가 날아든 한 발의 총탄이 그의 목을 관통한 것이다. 킹 목사가 이곳을 찾은 것은 청소원들의 파업을 지원하기 위해서였다. 범인으로 체포된 얼 레이는 당초의 자백을 곧 번복하며 자신은 단지 ‘거대한 음모’의 한 부분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FBI와 군부 배후설 등 온갖 음모론이 제기되는 가운데 레이는 결국 99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던 중 1998년 감옥 안에서 숨졌다. 킹 목사의 죽음에 분노한 흑인들은 미국 전역 168개 도시에서 폭동을 일으켜 46명이 사망하고 2만 1천여 명이 부상을 당했으며 2천600여 곳이 불탔다. 킹 목사의 시신은 1억 2천만 명의 미국인들이 TV로 지켜보며 애도하는 가운데 조지아주의 애틀랜타 묘지에 안장되었다. 그의 묘비를 찾는 참배객들은 그의 묘비에 적힌 “자유롭게 되라, 자유롭게 되라… 나 드디어 자유를 찾았다.”는 죽기 5년 전 워싱턴 대행진 때의 연설 한 구절을 보며 그때를 회상하곤 한다. 워싱턴 DC 링컨 기념관 앞 광장을 가득 메운 30만 명의 인파 앞에서 “나에겐 꿈이 있습니다”(I have a dream)를 소리 높여 외치며 인종차별이 종식되고, 정의의 강물이 흐를 때까지… 비폭력 저항 운동을 계속하겠노라고 선언한 1963년 8월 28일의 그 날을 회상하곤 한다. (2) 1865년 4월 14일 밤, 링컨 대통령이 워싱턴 D.C에 있는 포드극장 2층 대통령 박스석에서 연극 <우리 미국인 사촌>을 관람하고 있을 때 한 사나이가 들어섰다. 링컨은 5일 전에 남군의 로버트 리 장군이 북군의 그랜트 장군에게 항복함에 따라 남북전쟁이 사실상 끝났다고 생각하고 연극을 보며 머리를 좀 식힐 참이었다. 그 사나이는 수개월 전부터 링컨을 납치하려 했으나 기회가 닿지 않자 살해하는 쪽으로 방향을 바꾼 남군 출신의 미남 배우 존 윌크스 부스였다. 부스가 링컨의 뒤로 다가가 데린저 권총의 방아쇠를 잡아당겼다. 링컨은 곧 고꾸라졌지만 총소리도, 부인 메리의 비명 소리도 연극에 몰입한 관객들의 폭소에 파묻혀 들리지 않았다. 밤 10시 13분경이었다. 같은 시각 슈어드 국무장관도 저택에서 부스의 공범에 의해 피격됐다. 부스는 근처에 있던 레스볼 소령에게까지 칼을 휘두른 뒤 1층으로 뛰어내리며 “시크 셈퍼 티라니스”(Sic semper tyrannis)를 외쳤다. 남군이 주장하던 버지니아주의 구호 “독재자의 것은 독재자에게로!”라는 뜻의 라틴어였다. 현장을 벗어난 부스는 남쪽으로 도주하던 중 4월 26일 발각되어 사살되었다. 피격당한 링컨 대통령은 밤새 치료를 받았으나 4월 15일 오전 7시 20분 56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의 시신은 4년 전 대통령으로 취임했던 그를 태우고 고향을 떠나 워싱턴으로 달려왔던 그 기차에 실려 다시 그의 고향인 스프링필드로 옮겨졌다. 미국인들이 두고두고 존경하는 인기 대통령 1번이 한 생애를 이렇게 마치고 말았다. “그는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고, 어릴 때 어머니를 잃었다. 학교 교육은 초등학교 6개월이 전부. 22세 때 첫 사업에 실패하고, 23세 때 주 의원에 낙선했다. 24세 때 또 사업에 실패하고, 26세 때 사랑하는 연인을 잃었고, 27세 때는 신경 쇠약과 정신 분열 치료를 받았다. 29세 때 읍장 선거에 낙선했고 34세 때 하원 의원 선거에서 낙선하고, 39세 때 하원 의원 선거에 또다시 낙선 46세 때 상원 의원에 실패했고 47세 때 부통령 선거에서도 낙선했으나 51세 때인 1860년에 16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깡마른 얼굴에 못생긴 모습이었지만 유머가 풍부한 사람이었고 재임 중 노예 해방과 남북통일의 위업을 이루어냈다.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의 정부는 영원히 존속할 것이다”란 말로 유명하다.
김형태 박사
<더드림교회•한남대 14-15대 총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