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축시대 세상 읽기] 트루가니니의 비극 (3)

Google+ LinkedIn Katalk +

트루가니니의 일생은 역사의 탁류에 휩쓸린 비극적인 삶이었다. 비극은 영국이 호주가 ‘테라 눌리우스’라고 선언하면서 초래했다. 영국은 그녀의 부족이 수천, 수만 년 거주하던 땅을 협상 상대인 국가나 정부가 없는 ‘주인이 없는 땅’이라고 선언하고 식민지를 건설했다.

하지만 그녀가 태어난 브루니 섬(Bruny Island)이나 태즈메이니아에는 팔라와 부족이 고유한 언어와 문화를 유지하며 살고 있었다. 가족 단위로 수렵 채취 구역 점유권을 존중했다. 정치적 사법적 권위를 가진 족장은 중재를 통해서 분쟁을 해결했다. 영국이나 서구의 제도와 달랐지만, 전통과 문화를 전수하는 교육도 시행했다.

영국은 무력을 사용해서 원주민을 몰살하고 태즈메이니아를 점령했다. 로빈슨은 원주민과의 분쟁 종식을 명분 삼아 남은 소수를 플린더스 섬의 위발레나 수용소로 이주시켰다. 안전한 안식처라고 약속했지만, 수용자들은 전염병과 영양실조로 죽어갔다. 로빈슨은 원주민의 문화와 언어를 부정하고, 영국식 문화와 기독교 신앙을 강제했다. 복식도 영국식 복장을 강요했다. 수용자가 감소하자 식민 정부는 1847년 위발레나 수용소를 폐쇄하고 생존자들을 태즈메이니아 본토의 오이스터 코브(Oyster Cove)로 옮겼다.

오이스터 코브 수용소는 습하고 황폐한 목조 건물이었다. 수용자들은 깊은 절망감 속에서 차례로 죽었다. 1873년 마지막 생존자가 된 트루가니니는 호바트로 옮겨졌다. 그녀는 사실상 ‘자기 민족의 언어와 문화를 공유할 사람이 아무도 없는’ 완전한 고립 상태 속에서 살았다.

그녀는 호바트에서 유명 인사였지만, 실제로는 인류학적 연구 대상이었다. 백인 사회는 그녀를 살아있는 전시물로 취급했다. 그녀를 ‘멸종하는 인종의 마지막 표본’으로 여겼다. 인류학자들과 수집가들은 그녀가 죽기를 기다리며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다. 그녀는 자신이 죽으면 몸이 조각나 연구 재료로 쓰일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트루가니니는 동료 윌리엄 란네(Wil liam Lanne)가 죽은 뒤 해골이 도난당하고 시신이 훼손되는 것을 보면서 극심한 공포에 시달렸다. 그녀는 죽기 직전 “제발 나를 해부하지 말아달라”, “산 뒤편에 묻어달라”, “내 재를 바다에 뿌려달라”고 정부와 주변인들에게 애원했다.

호주 원주민은 죽음을 단순한 끝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사후에는 영적인 세계인 ‘드림 타임’(Dreamtime)으로 돌아간다고 믿었다. 온 가족과 친척이 모여 고인을 애도하며 슬픔을 나누었다. 부족마다 독특하고 엄격한 전통 방식을 통해서 조상을 기렸다.

원주민들은 지금도 일정한 기간 동안 고인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다. 이름을 부르면 고인의 영혼이 안식하지 못하고 이승을 떠돈다고 생각한다. 고인의 사진이나 영상을 보거나 전시하는 것도 금기시한다. 전통 장례는 토착 식물의 잎을 태워서 연기를 내는 정화 의식을 거친 뒤 시신을 나무 위나 동굴에 보관한 뒤 뼈만 수습해서 조상의 땅에 묻는 2단계 장례 방식을 지켰다. 트루가니니는 자신이 죽은 뒤 벌어질 일에 대해서 공포를 느꼈다. 

1876년 5월, 트루가니니가 세상을 떠났을 때 정부는 그녀를 품위 있게 장사 지내겠다고 했지만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매장한 지 불과 2년 만에 태즈메이니아 왕립 협회는 시신을 발굴했다. 그녀의 해골은 1904년부터 1947년까지 태즈메이니아 박물관에 전시되는 수모를 겪었다. 트루가니니 사망 100년이 지난 1976년에 이르러서야 그녀의 유해는 화장해서 고향 바다에 뿌려졌다. 비로소 안식을 찾았다.

변창배 목사 

<전 총회 사무총장>

공유하기

Comments are clos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