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란과 환난 속에도 제주 복음 지킨 이도종 목사의 헌신
고산교회 담임 목회자는 신학교를 갓 졸업하고 목사 안수를 받은 양동혁으로 결정되었다.
이처럼 단시일에 교회를 부흥 성장시키고 후배에게 목회지를 허락한 이도종 목사는 일제 말 험한 시기에 끝까지 제주도에 남아 목회자를 모실 수 없는 미자립 교회들을 찾아 순방하면서 전도자의 사명에 헌신했다.
이는 이도종 목사의 제주선교를 위한 영혼 구령의 열정과 헌신이 뜨거웠음을 잘 보여준다.
제주노회가 신사참배를 반대하기로 선언하자 일제는 그를 한 달 동안 투옥했다. 다시 그는 고산으로 들어가 농사를 지으며 환난기가 지나 1945년 8·15 해방을 맞았다.
이도종 목사는 일제의 압제에서 벗어나는 것보다 복음을 활발히 전하게 된 것이 더 기뻤다. 그 사이 제주도에는 조남수(趙南洙) 목사가 와서 복음을 전했는데 두 사람은 효율적인 전도를 위해 상의했다. “조남수 목사님이 제주 남쪽을 맡고, 저는 북쪽을 맡겠습니다. 같은 곳을 두 사람이 다니는 것보다 더 효과적일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해방 후 제주도는 광풍에 시달리는 처지에 놓였다. 1948년 4월 3일, 한국 역사에서 결코 지울 수 없는 사건이 제주도에서 일어났다. 4·3 사건이 발생하므로 ‘낮이면 대한민국이요, 밤이면 인민공화국인 세상’으로 변하고 만 것이다. 낮에는 경찰과 서북청년단이 마을에서 의심되는 사람을 죽이고, 밤에는 공산무장대가 내려와 주민을 살해하는 등 집단학살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4·3 제주 폭동사건’으로 불리는 이 민중봉기는 공산 무장폭도에 의해 일어났다. 정부는 이 난을 진압하기 위해 경찰을 동원했는데, 그들은 양민과 폭도를 구분하지 못하고 난을 제압하므로 큰 사건으로 번졌다.
이럴 때는 조용히 숨어 있거나 전도를 제한해야 하는데 이도종 목사는 계속해서 전도와 예배를 드렸다. 예배를 원하는 곳이 있는데 목사가 신변의 위협 때문에 마다할 수 없었다.
이 사건의 여파가 점점 더 거세지던 1948년 6월 16일, 이도종 목사는 예전과 다름없이 자전거에 성경과 찬송가를 싣고 고산교회를 출발해 화순교회 예배를 인도하기 위해 산을 넘으려고 자전거를 끌고 천천히 올라갔다. “손들어! 어딜 가느냐?” “나는 목사인데 화순교회를 찾아가는 중입니다.” “음, 당신이 양놈들 사상을 전파하는 예수쟁이로구만. 당신은 미 제국주의 첩자가 분명해. 우리를 따라오시오.” 변명할 틈도 없었다.
이도종 목사는 그대로 산속에 있는 그들의 막사로 끌려갔다. 이때 “이 목사님!” 하고 부르는 소리가 있었다. 얼마나 맞았는지 얼굴이 피투성이로 몸을 움직이지 못하는 화순교회 이 집사가 쳐다보고 있었다. 행방불명되었다고 교회에서 걱정했는데 여기에 끌려와 있었다. 이도종 목사에 대한 심문이 시작되었다.
이승하 목사
<해방교회 원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