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은 신앙의 자리] 종로 (38) 독립의 함성 품은 경신학교, 민족의 지도자를 키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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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의 현장에 선 경신인들…독립운동의 산실

경신학교 址 ② (연지동 1번지)

연지동 1번지는 현재 공원으로 조성되어 있다. 옛 흔적은 모두 사라진 터이라 찾아볼 수 없지만 그 자리에 서서 옛 자취를 생각해보는 것 또한 찾는 사람들만의 특권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 답사를 계속한다. 비록 이제는 이곳에서 만날 수 없는 것이 되었지만 경신학교를 찾아들어 배움의 열정을 불태우던 가난한 조선의 학동들은 이 작은 언덕을 소망의 언덕으로 삼았을 것이다. 길 건너 창경궁의 울타리를 넘볼 수 없는 평민들의 자손이었지만 스러져가는 조선의 군주의 모습에 아파하면서, 그러나 국민의식을 찾았기에 국민의 손으로 이 나라를 다시 세우겠노라는 다짐과 함께 이 언덕을 올랐을 것이다.

그래서인가? 장로교회 선교부가 설립한 경신학교는 독립운동의 많은 지도자들이 배출되었다. 감리교회 선교부가 설립한 배재학당과 함께 민족의식의 고취와 독립운동에 앞장선 지도자들이 많이 배출된 것은 어쩌면 필연적인 것이었다. 국민중심의 국가관을 갖고 있지 못했던 시대에 선교사들에 의해서 시작된 학교들은 학생들에게 국민이 주권을 갖고 있는 국가의 개념과 민족의식을 깨우쳐주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민족의식의 고취는 자연스럽게 독립운동에 앞장서는 선각자들을 배출시켰다.

그중에도 1919년 3월 1일 탑골공원에서 예정되어 있던 독립선언문 낭독과 만세운동의 현장에서 지도자들도 없는 자리에서 직접 선언문을 낭독한 정재용이 바로 경신학교 출신이었다. 당시 탑골공원에는 경신학교 재학생 100여 명 전원이 참석을 해서 만세운동에 동참했고, 졸업생인 정재용은 선언문을 낭독한 후 군중과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그러나 정작 3.1독립만세운동을 말할 때 그의 이름은 낯이 설다. 3.1독립만세운동과 관련해서 생각하면 민족대표나 아니면 유관순 정도가 쉽게 떠오르는 이름이다.

그렇다고 민족대표 33명을 모두 기억하고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날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문을 직접 낭독하고 만세를 선창한 것은 정재용이었다. 실제로 당일 정오에 탑골공원에 모이기로 한 민족대표 33인은 사전에 유혈충돌을 걱정해 근처의 태화관에서 모이기로 하고, 그곳에서 선언문을 낭독한 후에 그 사실을 일본경찰에 알렸다. 그러나 탑골공원에서 기다리고 있던 군중들은 무슨 영문인지도 모른 채 기다리다가 시간이 지체되면서 술렁거리기 시작했고, 더 이상 기다릴 수 없는 상황에서 정재용은 자신이 품에 지니고 있었던 선언문을 꺼내서 분연히 낭독을 이어갔다. 그 후 그는 군중들과 함께 만세를 목이 터져라 외쳤다. 그러한 의미에서 실제로 탑골공원에서 선언문을 낭독하고 만세를 외치며 군중과 함께 거리로 나선 것은 경신학교 출신인 정재용이었다.

그는 황해도 해주에서 1886년에 태어나 경신학교를 졸업했다. 독립만세운동과 관련해서 1919년 8월에 일본경찰에 붙잡혀 평양감옥에서 2년 6개월간의 옥고를 치렀다. 하지만 그의 독립운동에 대한 의지는 오히려 더 굳어졌다. 출옥한 후에 서광신과 이기훈 등과 함께 조선의 미래를 열어보겠다는 일념으로 구국운동을 전개하면서 의용단 활동을 했다. 고향인 해주에 있는 구세병원 이사장으로 일을 하면서 그에게 주어진 기회를 이용해서 구국운동을 펼쳤다. 해방 후에는 해주시 초대 민선 시장이 되기도 했지만 이어지는 분단국가로서 맞닥뜨린 비극과 함께 또 한 번의 국난을 극복해야 했다. 

경신학교는 정재용만이 아니다. 이름을 열거하면 놀랄 만큼 많은 사람들이 독립운동의 과정에서 민족의 지도자로서 역할을 감당했던 인물들이 이 학교 출신이다. 예를 들어 파리강화회의에 조선이 독립국가인 것을 인정해달라고 요청하는 일을 맡았으며 상해 임시정부의 요인으로 활약했던 김규식, 김규식을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할 수 있도록 하는 역할을 감당했던 서병호, 임시정부의 내무총장 및 국무총리직을 수행한 도산 안창호,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인 이갑성, 민족대표 48인 중 한 사람인 김원벽, 2.8학생운동대표 김상덕, 독립군을 모집하고 군자금을 모금하면서 독립군을 도왔던 김인서, 3.1독립만세운동과 3.5학생운동을 주도한  이병주, 독립군 자금을 조달해서 중국에서 활동하는 독립군의 활동을 도운 나기호 등 그 이름을 열거하자면 많은 여백이 필요하다. 

또한 그들의 활약을 모두 정리하는 것도 필요하다. 그것은 남은 자들의 몫이면서 책임이다. 하지만 후손들이나마 잘된 경우는 선조의 활약에 대해서 정리된 사료들을 만들었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의 경우는 과거에 묻힌 채 잊혀지고 있다는 것이 더 안타깝다. 그것은 개인의 책임이 아니라 국가적인 책임이라는 생각이다.

이종전 박사

 인천기독교역사문화연구원 원장 

 개혁파신학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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