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강요 속 정릉 이전… 전쟁과 혼란 넘어 혜화동 시대까지 이어진 경신의 맥락
경신학교 址 ③ (연지동 1번지)
경신학교는 언더우드에 의해서 시작되어 정동시대를 거쳐 이곳 연지동시대를 열고 학교의 면모를 갖추면서 은둔의 나라에 미래를 이끌어갈 지도자들을 양성하는 역할을 감당했다. 식민지시대를 지나면서 많은 국가적인 지도자들을 배출하는 공을 세웠지만 학교는 굴곡의 역사를 이어가야 했다. 독립운동을 이끌어가는 지도자들이 배출된 학교이니만큼 일제 당국은 이 학교에 대한 간섭을 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니, 그것과 비례해서 학교운영은 어렵게 되었다. 일제 말기인 1941년에는 사실상 요지인 연지동 1번지 일대에 자리하고 있었던 학교를 정릉골짜기로 옮겨야 했다. 당시 정릉이 행정구역상 서울이 아닐 만큼 산골이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학교의 발전과 역할을 함에 있어서 매우 어려운 상황이 된 셈이다.
일제의 식민지 정책은 1936년을 기점으로 박해가 더욱 강화되었다. 특별히 선교사들에 의해서 운영되는 학교들에 대한 간섭과 통제가 강화되면서 운영의 어려움이 커졌다. 그중에도 배교를 강요하는 정책에 대해서 선교부는 일본의 요구를 들을 수 없었다. 이에 대해서 북장로교 선교부는 배교를 하면서까지 학교를 운영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폐교를 결정하고 선교부 산하에 있는 모든 학교들에 대한 조치를 취하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선교부의 움직임에 대해서 경신학교 동창회와 교사들, 그리고 한국 교회의 지도자들은 어떤 형태로든지 학교가 운영되고, 역사를 이어가야 한다는 입장에서 노력을 했다. 각계의 인사들이 경신학교의 유지를 위해서 백방으로 노력한 결과 1939년 선교부는 학교운영을 더 이상 하지 않고, 학교를 한국인에게 양도하는 결정을 했다. 조건은 교명을 바꾸는 것과 학교도 연지동에서 다른 곳으로 옮기는 것이었다. 이러한 결정은 선교부의 자발적인 것이 아니라 일제의 강요에 의한 것이었다. 이때 당시 경신학교 교사로 있었던 최태영이 나서서 이 학교의 역사를 이어가도록 하는 일을 주선했다. 그는 황해도 장연 출신으로 일본에 가서 유학을 하고 돌아와 이 학교의 교사로 재직하고 있었다. 그가 동향인 황해도 안악 사람 가운데 김홍량과 김원량이라는 사람들을 찾아서 김 씨 문중에서 학교를 인수해서 운영하면 좋겠다는 생각에 적극 주선을 했다.
그의 설득으로 김홍량과 김원량은 경신학교를 인수했다. 당시 경신학교가 있었던 연지동 1번지 일대의 부지와 건물은 약 20만 원 정도가 되었는데 6만5천 원에 선교부로부터 인수해서 7만 원을 받고 총독부에 팔았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인수자들은 이미 5천 원의 이익을 본 셈이고, 학교는 땅값이 싼 정릉동 산 9번지로 옮겨서 운영을 계속했다. 학교를 정릉으로 옮긴 다음 최태영이 교장으로 취임해서 교명을 바꾸는 것을 조건으로 양수했음에도 그 이후에도 계속해서 경신이라는 이름을 사용했다고 한다.
한편 총독부는 연지동의 경신학교 자리에서 체신국을 운영했다. 도심에 6천여 평의 넓은 부지는 금싸라기 같은 땅을 개발했다. 그러나 일제의 패망과 함께 이곳은 적산(敵産)으로 동국대학교 재단이 이것을 인수해 동국대학교 부속중고등학교로 사용하다가 1983년에 와서 극동건설이 학교건물과 부지를 인수해 그 자리에 현재의 쌍둥이 빌딩을 지었다. 이 과정에서 그 자리에 있었던 웰즈기념관과 푸스트기념관이 헐렸다. 그밖에 선교사들이 지었던 양옥들도 모두 헐렸다. 또한 경신학교 학생들의 자활을 위해서 수공부건물로 지었던 것은 총독부에 의해서 일본의 한 제약회사가 사용하도록 했는데 해방 후에는 남북의료기계제작소가 다음에는 양지학원이 사용했었지만 그 건물 역시 1980년대에 헐고 이화예식장을 지어 운영했다. 그러니 이곳 연지동 1번지 일대에서는 더 이상 경신학교의 자취를 찾아볼 수 없다.
경신학교는 해방과 이후 6.25전쟁이 일어남으로 부산에서 피난지 학교를 운영했다. 1951년 9월 1일에 부산 남부민동에 피난학교를 세워서 전란 중에도 다음세대를 위한 교육을 했던 것이다. 물론 피난지 학교는 경신학교만 운영한 것은 아니지만 오늘날 한국이 이만큼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전란 중에도 자녀를 가르치겠다는 의지만큼은 포기할 수 없었던 당시 부모세대의 공헌인 것은 분명하다. 전쟁이 휴전이 된 다음에 피난지에서 돌아온 학생들을 중심으로 다시 공부를 계속시켰다.
그리고 1955년 4월 1일에 현재 경신학교가 자리하고 있는 혜화동 산 4번지로 옮겼다. 6.25전쟁 이후의 한국사회는 제대로 된 것이 없었다. 혼란기에 학교를 옮긴 다음 정부기구가 하나씩 만들어지고, 사회적인 제도들도 자리를 잡으면서 교육부에서도 학교를 위한 법들을 만들었고 경신학교는 1964년에 학교법인 설립을 받아 지금까지 그 역사를 이어오고 있다.
이종전 박사
인천기독교역사문화연구원 원장
개혁파신학연구소 소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