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산책] ‘봄보리’와 ‘가을보리’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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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가을에 파종한 보리가 새파랗게 싹이 나서 추운 겨울을 잘 이겨냅니다. 봄에 파종한 보리도 싹이 나서 성장하는데 이 두 가지 보리가 모두 초여름 거의 같은 시기에 수확을 합니다. 이렇게 보리는 파종시기에 따라 ‘봄보리’와 ‘가을보리’로 나뉩니다. 봄에 파종하는 ‘봄보리’에 비해 가을에 씨를 뿌려 겨울을 나는 ‘가을보리’의 수확의 양이 훨씬 더 많습니다. 인생의 열매는 마치 ‘가을보리’와 같이 혹한의 겨울을 거치면서 더욱 풍성하고 튼실해지게 마련인가 봅니다. 혹한기를 보내고 있는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동토(凍土)를 녹이는 따뜻한 마음과 희망을 갖고 언 땅을 깨고 나오려는 열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가져봅니다. 

보리는 쌀을 주식으로 삼을 수 없었던 서민들에게는 굶주림을 덜어주었던 아주 소중한 곡식이었습니다. 보리는 볏과에 속하는 두해살이풀로 쌀 다음 가는 주식곡물이지요. 우리나라에는 고대 중국으로부터 전파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온대지방에서 널리 재배되고 있습니다. 

호주(濠洲) 시드니에 사는 교민 한 분이 고국을 다녀가는 길에 개나리 가지를 꺾어다가 자기 집 앞마당에 옮겨 심었습니다. 이듬해 봄이 되었습니다. 시드니의 맑은 공기와 좋은 햇볕 덕분에 가지와 잎은 한국에서보다 무성했지만 꽃은 피지 않았습니다. 

첫 해라 그런가보다 여겼지만 2년째에도, 3년째에도 꽃은 피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나서야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한국처럼 혹한의 겨울이 없는 호주에서는 개나리꽃이 아예 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동절의 혹한(酷寒)을 겪어야만 꽃이 피는 것을 전문용어로 “춘화현상(春化現象)”이라 하는데 튤립, 히야신스, 백합, 라일락, 철쭉, 진달래 등이 모두 같은 현상을 보인다고 합니다. 인생은 마치 “춘화현상”과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인생의 눈부신 꽃은 혹한의 겨울을 거친 뒤에야 피어나니까요.  

나도 시골에서 자라면서 평생 농사만을 지으시던 선친 덕분에 보리농사와 관련하여 귀동냥한 내용이 있습니다. 보리농사에는 ‘봄보리’[春麥]와 ‘가을보리’[秋麥]가 있는데 ‘가을보리’는 ‘봄보리’보다 잎도 강하고 그 뿌리도 강합니다. ‘가을보리’는 ‘봄보리’에 비하여 수확량도 많고 보리알도 굵으며 밥맛도 더 좋습니다. 시골에서 어린 시절 ‘맛없는 음식’을 지칭할 때마다 “봄보리 개떡”같다고 말하던 것이 생각납니다. 이 말은 봄보리가 ‘가을보리’보다 못하다는 것을 암시해주는 속담이 아닌가 합니다.  

‘가을보리’와 관련하여 재미있는 일화 한 가지가 있습니다. 부산광역시 남구 대연동에 가면 “유엔기념공원”이 있습니다. 이곳에는 한국전쟁에 참여했던 11개국의 2,300여 명의 장병들이 잠들어 있지요. 이 공원은 1951년에 조성되었고 1955년 대한민국국회가 유엔군의 희생에 보답하기 위해 토지를 영구히 유엔에 기증하기로 의결하였으며 1974년 2월 박정희(朴正熙, 1917~1979) 대통령은 ‘유엔기념공원’을 새로 단장하면서 공사완성 후, 기념식을 거행하기로 하고 유엔본부에 통보한 결과, 유엔에서 방문단을 보내겠다는 연락이 왔다고 합니다.

아직 추운 때여서 주변의 잔디가 누런빛이니 이를 안타깝게 여긴 박 대통령은 당시 정주영(鄭周永, 1915~2001) 현대회장을 불러 누런 잔디가 미관상 좋지 않으니 푸르게 만들 수 있는 묘안을 물었고 정주영 회장은 이곳에 잎과 뿌리가 든든한 가을보리를 이식하여 놓았다고 합니다. 기념식에 참여한 유엔본부방문단은 이 엄동설한에 어디에서 저런 푸른 잔디를 구해왔느냐고 감탄했다는 일화가 전해오고 있습니다.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 선생이 그린 《세한도(歲寒圖)》에 나오는 글귀에는 “날씨가 추워진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늦게 시듦을 알 수 있다”(歲寒然後知松栢之後凋也)라는 유명한 구절이 나옵니다. 이 명언은 사람이 어려운 시련을 겪고 나서야 그 사람의 진정한 품격이 드러남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그림의 제목 ‘세한’(歲寒)의 사전적 의미는 “음력설을 전후로 찾아오는 한겨울의 추위”를 이르는 말인데 이 말은 우리에게 “시련을 딛고 일어서는 사람에게만 영광스런 열매가 맺힌다”는 교훈을 줍니다. 가을에 심어 추운 겨울을 지나고 나서 수확하는 ‘가을보리’가 ‘봄보리’보다 잎과 뿌리가 강하며 보리알도 튼실하고 수확량도 많고 맛도 좋다는 사실에 주목하면서 우리는 여기서 ‘인생의 지혜’를 터득(攄得)하게 됩니다.

문정일 장로

<대전성지교회•목원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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