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당시 중학교 3학년 4반 반장을 하고 있어서 앞으로 나갔다. 그런데 몽둥이가 저 뒤 트럭에 있으니 가져다가 자기 반 학생이 들어오는 대로 하나씩 주어서 트럭에 태우라고 했다. 그때부터 반장들은 저녁에는 집에 갔다가 다음날까지 오며 가며 그들의 말대로 했다. 3일째 되는 날은 왠지 학교에 나가기가 싫어서 나가지 않고 이모집에 있었다.
5일째 되던 날, 서울이 아주 조용해서 고향인 용인 포곡집이 생각이 났다. 가족들은 피란하신 건지 궁금해서 이모님께 시골집에 내려가겠다고 했다. 가는 것이 조심스럽지만 가봐야지 하시면서, 한강 다리가 폭격에 절단되어 그리로는 갈 수 없고 천호대교 쪽으로 가보라고 말씀하셨다.
내 생각에도 가는 도중 폭격 등으로 조심스러웠으나 아침 9시에 출발해서 천호대교를 무사히 건넜다. 다리가 없고 민가가 드문 산 밑에 오솔길 같은 곳을 찾아서 경기도 광주를 지나 용인까지 하루 종일 걸어 저녁 6시경에 집에 도착했다. 그런데 집에는 할아버지 혼자 계시고 가족들은 소마차를 가지고 피란갔다고 하셨다.
6.25 전쟁 피란 생활 상경 중
전쟁 체험
할아버지는 가족들이 소마차 끌고 남쪽으로 내려갔으니 어서 너도 피란민 따라서 가라고 하셨다. 그러나 차마 떠날 수가 없어서 할아버지와 하룻밤을 같이 자고 다음날 아침 9시경 피란민을 따라갔다.
소마차가 어디 있는지 찾아가며 빠른 걸음으로 내려갔다. 마침 충남 대덕군 농촌 마을 처마 밑에 소마차를 발견했지만 우리 집 소마차가 아니라 한숨이 절로 나왔다. 한 시간 정도 더 내려가니 처마 밑에 세워져 있는 마차와 낯익은 소가 있었다. 가까이 가보니 부모님과 동생들이 마차에 앉아 있는 것을 발견했고 서로 잡고 울 수밖에 없었다.
가족들의 만남은 하나님의 은혜였으며 사랑이었다. 그동안에 있었던 이야기를 서로가 나누면서 하룻밤을 자고 나니 피란민들이 모두 집으로 향해서 되돌아가고 있었다. 알아보니 맥아더 장군의 지휘하에 유엔군과 아군이 힘을 합해 인천상륙작전으로 돌진하고 낙동강을 기점으로 전세가 바뀌어 북으로 반격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피란민들이 집으로 향해서 돌아가고 있었다. 유엔군들도 서울 쪽으로 올라가면서 선도차에 타고 있는 한국군인 상사가 나를 보더니 차를 세웠다.
최석산 장로
흑석성결교회
수필가
사진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