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여정] 서민 중심에 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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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심이 곧 천심이요, 나라의 주인은 백성이다.’라는 말을 우리는 자주 듣는다. 즉 백성이 있어야 나라가 존재하고 그 나라의 근본은 국민이라는 뜻이다. 그 국민 가운데 중심이 되는 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서민일 것이다.

나는 정치활동을 할 때도 서민 행정 중심을 첫째로 꼽았다. 왜냐면 모든 정책과 여론의 중심에 민중을 대변하는 서민들의 생활이 있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보라. 4·19혁명 때도 부마항쟁 때도 문민정부의 단초를 제공한 것도 독재를 무너뜨릴 때도 서민들의 봉기가 한결같이 결정적 요소로 작용하지 않았는가. 돌이켜 보면 흔히들 우리 국민 중 지식인 3%가 우리나라를 움직인다고 해도 나라의 근본이 되는 정치와 정책을 바꾸고 보다 발전적인 미래관과 국가를 변모시키는 데는 대중, 즉 서민의 주장과 여론이 크나큰 분수령으로 그때마다 결정적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일찍부터 서민 중심의 존재와 더불어 함께하는 발전적 의미를 알고 있었기에 더욱 서민 관계에 초점을 두었다. 이는 평소의 나의 지론과 어릴 때 부모님이 세상에서 유일한 존재는 없고 서로의 배려와 존중과 존경, 그리고 소통만이 함께하는 동행을 이룰 수 있다는 말씀을 늘 들어온 터였다.

처음 내가 서민과의 관계를 맺은 것은 1978년 4월의 선거에서 문현 3동의 선거관리위원을 맡은 것이 시초였다. 물론 정치를 위한 초보적 단위의 기구였지만 동민을 위한 질서유지와 행정 절차에 대한 순서와 민주주의에서 누릴 수 있는 참정권에 대한 계도 역할이었기 때문에 지금도 인상에 깊이 남아 있다.

그리고 힘없고 억울한 사람들, 또한 노약자와 장애인을 위한 순수 사회단체인 부산 YMCA 회원 모집운동의 와이즈맨 이사를 기꺼이 맡은 것이다. 1986년 3월의 ‘부산직할시 부산시보’ 현지 통신원을 맡은 것도 다 그와 같은 취지요 맥락에서였다.

이때만 해도 부산에서 자리잡고 제법 부도 쌓고 명성도 얻었을 때였지만, 별 볼일 없는 일이나 한직이라도 가난하고 불쌍하고 소외 받는 계층이나 돈 없는 서민들에게 필요로 한 일이라면 나의 지위상승이나 신분이나 직무에 관계없이 즐거이 무슨 일이라도 맡아서 최선을 다하던 시절이었다. 그것이 나의 보람이요, 기독교의 교리와 하나님에 대한 깊은 신앙심의 발로였다고 생각한다. 

1987년 6월에는 ‘부산광역시 위민봉사위원으로 활동했으며 청소년지도협의회 위원과 1990년 5월에는 ‘부산직할시 여론모니터’로도 위촉받아 일할 때도 전혀 나의 신분이나 위치를 고려하지 않은 최일선에서 서민들을 보호하고 위한다는 오로지 나만의 결정으로 성심성의를 다했다.

돌이켜 보면 나는 정치와 사회, 경제, 종교계의 굵직굵직한 직함도 갖고 있었지만, 좀더 평범한 시민들에게 다가가는 서민적 면모가 어려운 그분들의 난제를 극복하는 데 희망적인 미래관이 될 수 있다면 나 하나의 봉사는 더욱 큰 기쁨으로 환원된다고 생각하며 그 어떤 일이라도 기꺼이 맡은 시절이었다.

1996년도인가. 문현 3동의 정비공사 명예 감독관을 맡고 있을 때 초로의 늙은 이 부부가 나를 찾아왔다. 한눈에 보기에도 가난에 찌든 힘겨운 모습과 남루한 의복의 차림새로 미래가 없는 듯 풀죽은 모 습이었다.

내게 큰 인사를 하고는 겸연쩍은 듯 사정을 설명해 나갔다. 하수공사의 정비 중 자기 집은 골목에서 한참이나 떨어진 높은 곳의 옹벽 근처에 있어 이번 정비사업의 대상이 되지 않는데, 하수도가 없으니 여러 오물들을 일일이 근처의 여분의 땅에 남이 볼세라 근근이 노부부가 함께 버리니, 그 냄새로 이웃들의 여러 항의를 받느라 참으로 곤혹하다는 것이었다. 더구나 하나 있는 아들은 배를 타고 선원으로 나가 몇 년에 한번 들르는 형편이니 어떻게 좀 도와 줄 수 없느냐고 통사정하는 것이었다.

듣자 하니 참으로 형편이 어렵고 구차한 삶을 사느라 인생 자체를 포기하며 그날 그날을 겨우 연명하는 처지로 보여 난감했다. 

나는 관의 행정과 관련 사업집행을 소상히 잘 아는 터라 어떻게 할 수가 없다고 생각했지만 걸인풍의 노부부의 절실한 간청을 물리칠 수 없어 담당감독관에게 물으니, 자신도 예산상 어찌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한동안 깊이 고심하다가 감독관에게 매설 하수관 길이를 묻고는 방금 들은 노인의 참담한 실정을 소상히 얘기하고는 그 노부부의 집까지 가는 여분의 하수관 교체비는 사비로 내가 어떻게 해줄 테니 다소 노동 시간이 연장되더라도 그 노부부의 집까지 좀 연결시켜 달라고 통사정을 하니, 한참을 난감하게 생각하던 공사감독도 내 진실한 설득과 성의에 감읍했다며 나의 요구를 따라주었다.

물론 작업시간은 다소 연장되어 이유를 모르는 노동자들은 다소 불평했지만 나와 공사감독관은 모처럼 좋은 일을 했다는 기분으로 서로 흡족한 웃음을 나눌 수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 하수관이 그 노부부의 집까지 이어지자 가난한 주름투성이의 노부부가 어린애처럼 기뻐하며 함박웃음을 웃던 그 모습이 아직도 눈에 보이듯 선하게 아려온다.

나는 사회가 필요로 하는 어느 곳이든 서민들의 고충과 고난이 있다면 그 어떤 현장에도 달려가서 현장을 직접 챙기고 마을 주민들의 여러 가지 애로사항을 경청하며 어떻게든 그들의 입장에서 배려하고 해결해 주려 혼신의 힘을 다했다.

어려서부터 나는 내가 만약 훌륭한 직함을 갖고 일면 사회적으로 출세하더라도 근근이 어려운 형편을 유지하거나 나보다 가난하고 못사는 열악한 삶을 유지하는 취약한 사람들의 편에서 일하고 싶었다.

더불어 사는 생의 공존이 나의 참 신앙생활이요 평소의 지론이었기 때문이었다. 지금도 이 마음은 변함없이 계속되고 있다. 아니, 이 세상에 내가 생존하는 한 영원히 이 사회의 여러 취약계층의 사람들과 함께하는 동행의 길에 서고 싶은 마음이다.

양한석 장로

• 문현중앙교회

• 시인 

• 정치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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