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마자 선교사, ‘헌신•나눔의 삶… 교육 통한 희망’
서서평 선교사의 장례식에 참여한 모든 사람들은 한 편의 드라마를 보는 듯했고, 광주 시민들은 이를 계기로 서서히 교회에 나오기 시작했다.
유화례 선교사는 다음날 학교 채플실에 모여 있는 수피아여학교 학생들에게 이렇게 외쳤다.
“사랑하는 학생 여러분, 어제 우리는 서서평 선교사의 고별식에 참석해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면서 눈물로 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여러분에게 꼭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의 시신은 한국 의학계에 기증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의 심장과 비장, 오장육부는 유리병에 담겨 있습니다. 그 대신 뱃속에는 볏짚으로 채워 바늘로 꿰맸습니다.”
서서평 선교사의 장례식을 지켜보았던 동료 선교사 스와인하트(Mr. M. L. Swinehart, 한국명 : 서로득)는 그후 「아름다운 생애」란 책을 출판하기도 했다.
서울 세브란스 병원 부속 간호전문학교 설립자였던 쉴즈는 서서평 선교사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서서평은 군산과 광주뿐 아니라 세브란스 병원에 있어서 여러 가지 사업과 교육에 종사하시던 중 그 외 긴급한 문제를 해결하는 일이라든지, 혹은 한국 간호사업의 최선의 전진책을 위해 먼 장래의 필요한 일까지 계획하시기에 모든 기회를 잃지 않고 이용하셨으므로 과연 한국 안에 있어서 간호사로서나 또한 간호 교육자로서 하신 그의 사업은 예상할 수가 없습니다.”
서서평 선교사는 불쌍한 전라도 사람을 위해서, 더 나아가 한국의 간호계와 전국 여전도회에도 크게 공헌을 한 사람임에 분명하다.
타마자 선교사와 광주선교부
탁깍쟁이 선교사
광주 숭일학교를 민족의 수난 속에서도 잘 지키고 키워 왔던 타마자 교장은 1927년 김아각 선교사에게 맡기고 선교 현장으로 나가 전남 동북지방, 특히 담양을 중심으로 그의 기독교 이상을 실현해 갔다.
타마자 선교사는 미국 뉴저지 주에서 존 산드만 탈메지와 메라일라 크레인 사이에서 출생했다. 1903년 투렌 대학에 입학해 1907년에 졸업을 했으며, SWPU대학 신학부에서 목사 수업을 받고 1909년에 졸업했다. 다시 프리스턴신학교에서 1년간 신학 수업을 마친 후 7월 15일 목사안수를 받고 한국 선교사로 부임했다. 그가 쓴 옥중일기 가운데 이런 글이 있다.
“1910년 한국이 일본에 의해 강제로 합병되기 3일 전에 나와 내 아내는 나라를 빼앗긴 한국에 처음으로 도착했다. 우리가 탄 작은 배가 목포 앞에 있는 강에 닻을 내리자 많은 사람들이 시끌벅적하게 배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그 중 맹현리 선교사 부부가 소리를 지르면서 우리를 환영했다.”
타마자 선교사의 목포 도착은 1910년 8월 26일이었다. 국권을 빼앗긴 한국인. 어떤 모습으로 식민지를 통치할지 공포에 떨고 있는 호남인의 사도가 되기 위해서 그는 성경책을 안고 목포 부두에 안착했다.
목포에 도착한 타마자 선교사 부부는 이틀간 맹현리 선교사 집에서 여독을 풀고 곧 선교임지인 광주로 향했다. 목포에서 증기선을 타고 영산포까지 갔으며, 다시 영산포에서 자동차를 타고 광주 양림동까지 무사히 도착했다. 어수선한 광주의 거리였지만 하루를 쉬고 배유지 선교사가 소개해 준 최씨로부터 한국어와 함께 한자를 배우기 시작했다.
더욱이 배유지 선교사가 1912년 일시 미국에 귀국함으로 그의 당회장 구역인 24개 교회를 맡게 되었다. 광주 내륙 지방에 있는 24개 교회는 하루에 한 교회씩밖에 돌보지 못했으며, 더구나 광주 선교부에는 한 사람의 한국인 목사도 없었기에 타마자 선교사의 일은 벅찰 정도로 많았다.
가는 곳마다 열심있는 새신자들이 학습 및 세례문답을 요청했으며, 성찬예식은 언제 하느냐는 질문도 수없이 받았다. 또한 겨울이 되면 오원기념각에서 모이는 달성경학교에도 엄청나게 사람들이 많이 모였다. 이들을 교육시키는 일에 광주에 있는 선교사는 물론 목포, 전주, 군산에 있는 선교사들까지 합세했다.
한국에 대해 자신을 가졌던 타마자 선교사는 1915년 광주 숭일학교 제5대 교장으로 취임하며 광주를 전남의 스포츠 요람지로 만들기도 했다. 이때부터 축구는 물론 야구, 정구, 농구 등 많은 운동을 소개했던 타마자 선교사는 신체가 건강해야 나라를 찾을 수 있다는 신념으로 학생들을 대했다.
그래서 그는 그의 선교구역이었던 담양에 자신의 집을 건축하고 그곳에서 담양성경학교를 개설했다. 이때 담양의 많은 청년들이 타마자 선교사가 운영하는 담양성경학교에 모이기 시작했다. 특별히 전남 북부 지방의 젊은 청소년들은 타마자 선교사의 청교도적인 생활에 감동이 되어 그를 더욱 존경했다.
한번은 담양을 가는데 뜻하지 않게 담양천에 물이 많이 흐르고 있었다. 이때 돈 많은 양반이나 관리들은 다른 사람의 등에 업혀 건너가 얼마의 수고비를 지불했는데 선교사 타마자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속옷만 입고 담양천을 건넜는데 그의 말이 걸작이었다.
“여기 건너는 품삯을 모아 가난한 농촌 교역자의 양식을 사려고 그랬습니다.”
그는 이러한 일을 여러 번 반복했고, 이때 그의 삶이 너무 철저해 붙여진 이름이 탁깍쟁이였다. 그런가 하면 그는 비가 올 때에는 인력거 같은 것을 타고 다닐 수도 있었지만 비닐옷을 입고 다녔으며, 담양성경학교를 운영하면서 담양 및 곡성 등지를 순회할 때도 자가용을 타지 않고 자전거를 타고 다녔다. 그래서 그에게 붙여진 또 하나의 별명은 자전거 선교사였다.
그런데 담양성경학교 학생들 가운데는 영어를 곧잘 하는 학생도 있었다고 한다. 이 학생은 혹시 미국 유학이라도 갈 수 있을까 하고 열심히 공부했던 것이다.
“여러분, 미국 유학 생각도 마세요. 미국 가면 여러분은 타락하고 돌아옵니다. 지금 미국은 댄스다 하면서 남녀가 손을 붙잡고 춤을 추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미국 갈 것은 아예 잊어버리고, 여기서 공부를 잘해서 평양신학교에 가면 그것이 최고입니다.”
이렇게 해서 담양성경학교 학생들은 미국에 대한 동경은 아예 포기하고 평양신학교 가는 것만이 유일한 희망이었다. 그래서 담양성경학교를 졸업한 박동완, 김용선, 조용택, 김재택 등은 평양신학교에 입학을 하고 평양을 오르내리면서 공부를 했다.
그런데 1938년 총회가 신사참배를 결의하자 평양신학교는 폐쇄되고 말았으며, 이들 신학생들은 타마자 선교사의 선교 구역에서 전도사로 활동하고 있었다. 그러나 일본 경찰은 매주일 이들 전도사들이 교회에서 신사참배 및 동방요배를 실시하는가 안 하는가를 조사했다.
안영로 목사
· 90회 증경총회장
· 광주서남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