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사] 전라도가 고향이지요 (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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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와 섬마을에 생명 전한 의료 선교사의 발자취

오원 선교사는 교통이 불편해서 목포진료소까지 나오지 못하는 많은 도서 지방 환자들에게까지 관심을 갖고 섬까지 찾아가서 진료 겸 전도를 했던 일이 수없이 많았다. 으레 도서 지방을 순회하려면 부둣가에 나가야 했는데, 부두에는 수많은 선원과 어부들이 모여서 큰 시장을 이루고 있었다. 이러한 곳까지 관심을 가진 오원 선교사는 그들에게 전도지와 함께 목포진료소를 소개했다.

‘누구든지 자신의 몸에 이상이 있으면, 양동에 있는 목포진료소로 찾아오십시오. 정성껏 진료해 드리겠습니다. 의사 오원 올림’ 이러한 전단은 수없이 뿌려졌지만 좀처럼 찾아오려고 하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얼마 후인 1900년에 그는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 소속 휘팅 (Dr. G. Whiting) 의료 선교사와 결혼을 하고 목포에서 함께 진료에 임했다. 부녀자들은 그 동안 병원 오기를 꺼려했지만 휘팅 선교사가 목포에 오자 부녀자들의 건강은 여의사가 담당하게 되었다.

그런데 1901년 이 부부 의사는 선교에 무리를 했는지 건강이 좋지 않아 목포를 잠시 떠나 귀국해야 했다. 미국에 있는 동안 다시 몸이 회복되자 목포로 다시 돌아와 목포진료소에서 계속해서 활동했다. 1904년 이들 부부는 광주선교부가 개설되자 배유지 선교사와 함께 광주로 이거했으며, 광주에 최초로 광주진료소를 개설했다.

그후 목포진료소는 노란 의사가 맡아 진료에 임했는데 그는 목포에 도착하자마자 어학 훈련으로 많은 고생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목포사람들의 그 따뜻한 마음씨는 그로 하여금 목포를 고향처럼 느끼게 했다. 그가 선교잡지에 발표한 글의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내게는 전라도가 마치 고향 같다. 먼저 우리 선교부 선교사들의 충성심에서 우러나오는 진심 어린 악수와 아름다운 환영의 말들은 나로 하여금 ‘이 조용한 아침의 나라에서’ 내가 필요한 사람으로 환영받고 있다고 느끼게 했다. 많은 사람들이 내게 이러한 말로 인사했다. ‘노란 씨, 저희들은 당신이 온 것이 의사들을 보내 달라는 우리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분명 사람이 가진 모든 힘과 재능들이 한 이방 민족을 위해 쓰여지고 있다고 느낀다는 것은 대단히 기쁜 일이다. 선교지 목포에서 우리는 본국에서는 알 수 없었던 하나님의 모습을 새롭게 경험하게 되었다. 여러분이 기도할 때마다 목포를 기억해 주시기 바란다.” (1905년 3월호)

목포를 잊을 수 없었던 노란 의료 선교사는 광주선교부의 사업이 확장되자 1905년 11월에 광주로 이거하면서 오원 선교사의 뒤를 이어 의료 사업에 진력을 다했다. 한편 전주에서 수난을 당한 보의사 선교사가 목포로 다시 돌아와 의료 사역에 임하자 목포는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되었다. 그런데 보의사 선교사는 물불을 가리지 않고 일에 열중하는 사람이었기에 그의 건강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되어 있었다.

더욱이 목포 선교 구역은 너무 넓었다. 목포와 인접해 있는 신안 앞바다의 크고 작은 섬, 여기에 진도, 완도 그리고 거기에 따른 또 다른 섬들마다 올망졸망 모여 사는 사람들이 수도 없이 많았다. 이러한 섬을 그냥 지나칠 수 없었던 보의사 선교사는 언제나 조력자들을 대동하고 진료에 임했다.

그런데 이러한 열심 때문에 그만 열병에 걸려 1911년 귀국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는 목포에서 일본 고베로 배를 타고 가서 다시 고베에서 동경 옆에 있는 요코하마로 가배를 타고 귀국했다. 미국에 도착한 보의사 선교사는 자신의 고향 루이빌에 안착했지만 병이 너무 악화되어 회복하지 못하고 1918년 목포 하늘을 바라보면서 끝내 하나님의 나라로 떠났다.

그의 사망 소식을 들은 목포진료소 직원들과 그를 통해서 건강을 되찾게 된 많은 사람들은 그의 사랑을 못 잊어 몇 번이고 그가 묻혀 있는 미국 쪽을 바라보면서 수없이 기도를 했다고 한다. 보의사 선교사가 떠나자 목포진료소는 또 문을 닫을 형편에 놓이게 되었다. 그러나 때마침 군산 예수병원에서 활동하던 알렉산더 의사가 귀국할 때 같이 갔던 오긍선이란 청년이 미국에 있는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해 군산 예수병원에서 의사로 활동하다가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교수로 재직하고 있었는데, 그가 목포진료소를 맡게 되었다.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그의 의술은 참으로 놀라우리만큼 큰 효과를 거두었다. 그도 역시 잠시 있다가 떠났고, 그 자리를 리딩 햄(Dr. R. Sammuel Leadingham, 한국명: 한삼열) 의료 선교사가 맡았다. 그런데 그가 부임한지 얼마 안 된 1914년, 병원에 뜻하지 않은 재난이 엄습해 왔다.

“불이야, 불이야.”

병원에 입원해 있던 환자들은 모두가 놀라 병원 밖으로 뛰쳐나왔다. 그런데 그날 숙직을 맡아 담당했던 조수는 끝내 나오지 못했다. 목포소방서에서 나와 화재 원인을 조사했는데 숙직자 당번이 병실을 돌 때에 남포등을 들고 돌았는데 병실에 있는 알코올 통에 그만 불이 점화되면서 순식간에 번져 나갔고, 그는 그 자리에서 사망하고 말았다. 이때 병원은 전소되었기에 할 수 없이 입원해 있던 환자들을 선교사 집과 선교부 사무실로 옮겨 임시로 진료를 받으면서 얼마 동안 지내게 했다.

때마침 이 소식을 전해들은 미국 본부에서는 이 사실을 선교소식지에 싣고 기도를 부탁했다. 그리하여 미주리 주에 있는 성요셉장로교회 교인들이 특별 헌금을 해서 거액의 헌금을 목포진료소 한삼열 선교사에게 보내 왔다. 원장인 한삼열 선교사는 미국 남장로교 한국 선교회 회원에게 알리고 곧 병원 신축에 착공했다.

이때 인부들은 대부분 중국인들이었으며, 이들은 최선을 다해 병원을 완공했다. 그리고 입주식을 가진 후 그 이름을 프렌치기념병원이라 했다. 그후 이 병원은 프렌치병원이라 불렸으며 목포 지방과 인근에 있는 마을, 그리고 섬지역에 있는 마을에까지 널리 알려졌다. 이때 병원이 새로 건축되었다는 소식은 어느새 물결을 타고 신안 앞바다에 널려 있는 섬 주민에게도 알려졌으며 바람을 타고 목포와 인접해 있는 무안반도와 해남반도 그리고 남쪽으로 내려가면서 장흥까지 알려졌다.

어느 날 맹현리 선교사는 흑산도 옆에 있는 가거도란 외딴섬으로 박도삼 전도사와 함께 전도하러 나갔다.

“아니 선교사님, 웬일이세요? 선교사님은 저를 모르실 것입니다. 저는 목포 프렌치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에 멀리서 선교사님의 얼굴을 여러 번 보았습니다.”

“선교사님, 맞습니다. 저 사람이 우리 병원에 입원해 있었는데 다리를 절단하고 아프다고 소리를 지르면서 소동을 친 일이 있었습니다.”

옆에 있는 박도삼 전도사의 말을 듣고 맹현리 선교사는 그 환자의 상태를 자세히 쳐다보고 확인한 후 두 사람은 병원에서 일어났던 이야기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나누게 되었다.

“선교사님, 제가 한삼열 선교사로부터 다리를 절단하는 수술을 받고 이제는 완전하게 나아서 이곳에서 혼자 신앙에 정진하고 있습니다.”

이 환자는 목포 프렌치병원에서 자신의 병을 고쳐 준 선교사의 은혜가 너무 감사해서 이집 저집 다니면서 전도에 힘을 기울이고 있었다.

안영로 목사

· 90회 증경총회장

· 광주서남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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