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일저일 생각하니] 상동교회 전덕기 목사님의 교육정신과 나라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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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리교 상동교회 시무 전덕기 목사(1875-1914)는 아홉 살 때 부모 잃은 고아신세였다. 남대문에 상동교회를 설립한 미국 선교사 윌리엄 벤튼 스크랜튼(1856-1922) 목사를 만남으로써 인생의 대전환기를 맞게된다. 열일곱 살에 상동교회 교인이 되면서 전덕기 청년은 신앙인격을 갖추고 새로운 인생관 가치관 세계관을 확립하게 된다. 전덕기 목사가 스크랜튼 목사 설교에 크게 감화받은 내용은 “가난한 자에게 기쁜 소식을, 억눌린 자에게 자유를, 계급적인 사회에 평등을”을 외친 말씀이다. 이사야 55장 1절 말씀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의 말씀과 부합되는 내용이다. 

전덕기 청년은 하나님 은혜와 스크랜튼 선교사의 배려로 신학공부를 마치고 전도사 시무를 거쳐 상동교회 담임목사가 되셨다. 기독교 신앙관을 바탕으로 투철한 민족주의에 감화 감동 넘치는 전덕기 목사의 설교를 듣기 위해 많은 애국지사들이 상동교회로 모여들어 안창호 이승만 김구 이회영 이동휘 이동녕 남궁억 신채호 이필주 이승훈 양기탁 최남선 주시경 등이 상동파라는 애국지사들의 역사적 한 계파를 이루게 했다. 우리나라 원수 이등박문과 매국노 이완용이 앞장서서 을사늑약(1905), 정미칠조약(1907) 등의 체결을 이루어 나라가 망국 위기에 처함을 보고 1907년 2월 20일 제물포항으로 귀국한 도산은 먼저 전덕기 목사를 만나 국내 애국비밀단체 신민회를 조직할 때 전덕기 목사를 총무로 모셨다. 일찍이 21세에 평남 강서에 도산 안창호가 남녀공학 사립 점진학교를 세워 교육입국정신을 보였다. 

이 도산의 교육 입국정신에 영향을 받은 전덕기 목사는 스크랜튼 목사로부터 인계받은 공옥여학교(1897년 설립) 공옥남학교(1897년 설립) 이 두 학교 초등과정에 신앙의식 애국의식 교육을 시켜 인재 양성에 힘썼다. 그리고 1904년에 중등과정 상동청년학원을 설립해 상동교회 교인 주시경 선생을 국어선생으로 모셔 한글운동의 큰 빛을 남겼다. 최남선(국사) 남궁억(영어) 이필주(체육) 인사들을 선생으로 모셨다. 신앙교육은 전덕기 목사가 직접 교육했다. 상동학원 출신 제자들과 함께 주시경 선생이 신촌 봉원사에서 오늘의 한글학회 전신인 국어연구학회를 설립했다. 1908년 8월 31일에 창립되어 한글학회는 올해 117주년 창립기념 행사도 가졌다. 전덕기 목사가 주시경(1876-1914) 선생을 상동교회 남녀공옥학교 상동청년학원 국어선생으로 모셔 한글사랑 나라사랑에 큰 공로를 이루셨다. 전덕기 목사는 을사늑약 반대시위 그 무효 취소 상소운동 등으로 일제와 맞서 항일투쟁을 벌였다. 일제는 1912년 105인 사건을 조작해 전덕기 목사도 체포하고 고문했다. 심한 일제 고등계 형사들의 고문으로 1914년 3월 23일 39세로 하늘나라 가셨다. 

오늘의 고양시에 묻혔다가 1934년 일제의 이장 압력으로 화장해 재를 한강에 뿌렸다. 그 위패가 서울 현충원에 위패로 모셔져 있다. 전덕기 목사의 사랑으로 우리 나라 국어운동의 횃불인 주시경 선생도 1914년 7월 38세 나이로 별세해 전덕기 주시경 두 친구가 1914년 같은해 하늘나라로 가셨다. 전덕기 목사는 1962년 정부로부터 건국훈장독립장을 받았다. 청산학원 출신 인재로 외솔 최현배 한결 김윤경 같은 애국지사 한글학자가 배출되었다. 1998년 외솔회 발행 ‘나라사랑’ 제97집은 전덕기 목사 특집호로 엮어 그 교육과 애국정신을 기렸다.

오동춘 장로

<화성교회 원로, 문학박사,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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