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회복] 엠마오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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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부활의 영광스러운 몸을 가지시고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은 모두 열두 번이었다. 그 중 세 번은 복음서의 기사와 관계가 있다. 곧 다메섹 도상에서 사도 바울에게, 돌에 맞아 순교한 스테반과 밧모섬에서 사도 요한에게이다. 아홉 번은 모두 복음서에 기록이 되어 있다.

맨 처음 막달라 마리아 등 여인에게, 다음에 시몬 베드로, 엠마오 가는 길의 두 제자에게, 다음에는 제자들이 모인 곳에 나타나셨다. 그 다음에 도마에게, 갈릴리에 내려가 강가에서 베드로 등에게 나타나시고 마지막으로 그들을 인도해 베다니로 가셔서 손을 들어 축복하시고 동시에 그들을 떠나 승천하셨다.

‘부활 후 예수님의 나타나심!’ 그 광경을 가장 극적으로 묘사한 것이 누가복음에 기록된 엠마오 가는 길에 나타나신 기록이다.

누가는 당시 의사이고 과학자였다. “처음부터 목격자와 말씀의 일꾼된 자들이 전하여 준 그대로 내력을 저술하려고~”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나도~” 서론을 말한 다음 기록했다. 제자들이 예루살렘에서 12km 남짓한 엠마오 마을을 향해 걷고 있을 때였다. 그들의 화제는 자연히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이었다. 그런데 도중에 한 나그네가 다가와 그 일행이 되었다. “너희가 걸으면서 서로 주고받는 이야기가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중 하나인 글로바가 오히려 이상히 여겨 반문했다. “당신이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었다면서 최근 며칠 사이에 거기서 된 일을 당신만이 모른단 말이오?” 그리고 계속해서 예수님의 인격과 그 죽으심과 무덤이 비었던 것을 설명했다.

생각컨대 이것은 당시 예루살렘의 여론이었던 것 같다. 나그네가 말했다. “너희가 미련하기도 하다. 예언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믿지 못하는구나. 그리스도가 마땅히 그와 같은 고난을 받아야 영광에 들어가게 되지 않겠느냐?” 그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필연적인 까닭을 설명했다. 그들이 가려던 동네 엠마오에 이르렀다. 그가 더 여행을 계속하려는 것 같아 그들은 그를 만류해 머무르게 했다. 그런데 그는 오히려 스스로 주인의 자리에 앉고 떡을 떼어 축사하시고 그들에게 주었다. 이 때 두 사람의 눈이 갑자기 열렸다. 그가 주님이신 것을 알아본 것이다. 그러자 그들 앞에서 사라지셨다. 그들이 서로 말하기를 “길에서 그분이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성경을 설명해 주실 때 우리의 마음이 뜨겁지 않았던가!”

엠마오 기사는 아무런 수식어도 없지만 발랄하고 생동감이 넘친다. 솔직하고 자연스럽다. 주님 부활의 생생한 묘사이다. 두 사람의 제자 가운데 하나는 기자가 그 이름을 밝히지 않았는데 누가 자신이 아니었을까?

부활은 크리스천을 살리는 원동력이다. 2천 년이 지나도록 신앙을 지켜 온 힘이다. 왜냐하면 부활은 역사적 사실이기 때문이다. “나는 세상 끝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 아아! 내 주님 예수 그리스도시여! 우리가 그에게 매달릴 때 우리의 마음은 뜨거워진다. 우리는 육체의 부활을 믿는다. 부활은 기독교의 핵심이다. 기독교의 심장은 이 부활이다. 부활은 교회를 세웠다. 승천하신 그리스도는 기독교를 창시하셨다. 만약 다시 사신 그리스도가 아리먀대 요셉의 무덤에서 나오시지 않았다면 기독교의 희망은 사라졌을 것이다. 왕성한 열심도 이 무덤 속에 장사 지내버렸을 것이다.

‘엠마오 가는 길’(Walk to Emmaus)은 두 사람이 나누는 ‘이야기 길’이다. 두 사람이 예수님께  ‘미련하다’는 꾸중을 듣는다. 나는 오늘, 지금 꾸중을 듣고 있지는 않는가? 내 마음이 뜨거워지기를 기도한다.

부활의 진리는 이성과 지식 이상의 것을 가지지 않으면 이해할 수가 없다. 철학은 시대를 따라 변한다. 부활이야말로 구원의 중심이다. 소망을 지속시키는 힘이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지 않았다면 너희들의 믿음은 헛된 것이 되고 너희는 아직도 죄 가운데 있는 것이다.” “예수는 우리의 범죄함 때문에 죽음을 당하셨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하시기 위해 다시 살아 나셨느니라.”

김용관 장로

<광주신안교회·한국장로문인협회 자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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