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속 제주 선교의 불꽃, 헌신과 성장
그의 활동을 <기독신보>에서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 이도종 목사의 진정한 동포애와 영육 공존 상생의 활로를 전개하는 순복음주의적인 사자(使者)로 고함으로 진정 열정에서 울려 나오는 열렬한 설교에 성령의 뜨거운 불이 같이하여 일반 청중은 불교인, 보천교인, 유교학자는 물론, 죄를 각성 통회하며 구령의 참 도리를 믿기로 작정하는 사람이 많이 일어나며 내일부터는 중면 각지로 퍼져서 회개를 외쳐 전국교회의 총동원 응원 기도를 요청하며 귀 신보에 기재하여 전국교회를 총동원시켜 주시기 바라는 바이다.”
1933년 5월 1일 열린 제5회 제주노회 정기노회에서 노회 구역을 5구역으로 나누고 5인 목사에게 맡기기로 했다. 이때 이도종 목사는 표선과 성읍을 맡았고, 자전거를 타고 중산간 마을인 성읍에서 해안 가까이 있는 표선리 마을의 성도 집들을 방문하며 축호전도를 계속했다.
어느 날, 표선리 공회당에서 전도 집회를 했는데 일본이 조선을 강제로 침탈해 식민지로 삼은 것은 죄로,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의 학대를 견디지 못해 부르짖을 때 하나님께서 그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모세를 보내서 구원하신 것 같이 조선 민족은 출애굽 해방의 하나님 앞에 기도로 부르짖어야 한다고 강연하니 장내에 박수 소리가 크게 울렸다. 이것을 알게 된 일본 경찰이 출동해 요란하게 호루라기를 불면서 “주시! 주시!”(중지하라는 일본말) 하면서 현장을 급습했다. 이로 인해 이도종 목사는 연행되어 경찰에서 고초와 고문을 겪었다.
이처럼 어려운 시대였으나 어둠을 일깨우는 선지자의 외침처럼 이도종 목사의 열정적인 전도활동이 제주선교에 크게 공헌하고 제주교회의 발전을 크게 고무시킴을 알게 된 노회는 1935년부터 총회의 보조 없이 단독으로 그의 지방 선교를 지원하기로 결의했다. 그의 전도활동은 1937년 2월 고산교회의 위임목사가 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이도종 목사가 사면한 1937년의 보고서에는 그가 동 지방 선교할 때 개척해서 설립한 교회는 남원교회 외에도 신풍리교회가 있었다. 이도종 목사는 전도목사로도 뛰어난 역량을 발휘했으며, 개교회의 목회자로서도 발군의 노력을 보였다. 그는 1937년 2월부터 1939년 5월까지 고산교회 위임목사로서 고산교회를 목회하면서 인근 용수교회, 두모교회, 조수교회를 함께 돌보는 순회목회도 병행했다.
고산교회 당회록에는 그의 부임 직후인 7월 고산교회의 교세는 세례교인 46명, 학습 교인 17명, 원입교인 55명 등이었다. 주일 낮 예배 평균 참석자는 145명이었다. 그로부터 1년 8개월이 지난 1939년 3월 31일 자 당회록의 통계는 세례교인 62명, 학습교인 18명, 원입교인 70명 등으로 나타나 있고, 주일 낮 예배의 장년 평균 참석자 수는 200명으로 기록되었다.
고산교회를 이처럼 단시일 내에 자립교회로 성장시킨 그가 동 교회의 시무를 사면하고 다시금 고된 전도목사의 길을 선택한 것이다. 위의 통계기록과 같은 날의 당회록에는 “본 교회가 지방연합에서 분리하여 단독 자립하므로 회장(이도종)이 시무권을 5월 2일 삼양교회에서 개최되는 정기노회에 사면하기로 가결하다”라고 기록되어 있다(고산교회 당회록, 1939년 3월 31일 자).
이승하 목사
<해방교회 원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