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과 한국교회] 요나의 무덤이 있는 모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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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느웨로 가기를 거부한 교만과 바벨탑

 기원전 2500년 전후에 세워진 이쉬타르 여신전은 앗수르에서 가장 오래된 건축물이며 이후 왕궁과 신전들이 건축되었다. 이쉬타르 성문은 2개의 탑과 12개의 성문에 청색과 흑색의 유약을 바른 벽돌로 만들어졌다. 길가메시 서사시에 나오는 마루둑을 상징하는 무스루슈(뱀, 사자, 독수리 발톱을 가진 괴물) 575마리와 황소 모양의 하닷이 부조되었다.

메소포타미아강과 티그리스강 유역에 요나의 무덤이 있는 현재 모술에서 강을 건너 동편에 위치하고 있는 니느웨는 인류의 역사와 함께 세워진 장구한 역사를 지닌 고도로 2개의 커다란 큐윤지크 언덕과 네비 유누스 언덕이 있다. 성 주위에는 13㎞의 성벽이 있다. 요나 3:2에 니느웨 성을 도는데 3일 길이라고 할 만큼 커서 220만평에 달한다.

니느웨가 성경에 처음 소개된 것은 창세기이다. 노아 홍수 이후 후손이 세상에 흩어질 때, 함의 후손 니므롯이 출생한다. 그는 막강한 권력으로 여러 곳에 도시를 건설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니느웨이다.(창 10:8~12) 예루살렘 침공에 실패한 산헤립은 간신히 목숨을 보존하여 니느웨에 돌아갔으나 우상 신전인 니스록의 묘에 참배할 때 피살당했다. 니느웨는 상업이 번창하고 범죄가 극심하여 하나님의 심판 대상이 되었다. 요나를 보내 멸망을 경고하자, 왕 이하 온 국민이 회개함으로 멸망은 보류되었지만(욘 3:4~10), 기원전 606년에 바벨론에 패망되었는데 나훔과 스바냐의 예언이 응한 것이다.(나 3:7, 습 2:13)

니느웨에서 점토로 만든 서판과 설형문자 비문이 발굴되었다. 그 내용은 언어학, 천문학, 점성술, 종교적 문헌, 법전, 과학 서적과 기구, 문학과 예술, 역사서, 연대표, 상업서 등의 서판이 무려 2만6천개나 소장된 것으로 알려졌다. 우르의 지구라트도 대표적이다. 바벨탑 이후 전형적인 고대의 탑신전인 지구라트는 아브라함 시대에는 이 성에서 가장 큰 건물에 벽돌로 만든 축대에는 나무를 심은 맨 꼭대기는 달신의 성역이다. 원래는 3단으로 되었으나 지금은 맨 밑의 기저층만 남아 있다.

아시리아는 메소포타미아 북부 티그리스강 유역에서 일어난 아시리아 제국의 첫 번째 수도이다. 이곳이 모술에서 티그리스강을 따라 남쪽으로 약 100㎞ 떨어진 칼라앗 세르갓이다. 성경에서 앗수르라는 말은 도시와 나라 이름, 왕의 이름 (창 10:11)으로 자유롭게 사용되었다. 북쪽과 동쪽은 강이 자연적인 방어를 해주고 있으며 남쪽과 서쪽에는 방어벽을 통해 도시를 방어했다. 614년에 메대와 바벨론의 연합군에 의해 함락되고 612년에는 앗수르의 니느웨도 함락했다. 당시 앗수르 왕은 마지막 보루인 하란을 탈환하기 위해 이집트의 바로 느고의 도움을 받으려다가 실패했으며 이때 유다왕 요시아는 바로 느고를 므깃도에서 저지하다가 전사했다.(왕하 23:29~30)

살만에셀 3세가 건설한 갈라(니므롯)의 지구라트도 있다. 갈라는 니므롯 또는 그의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 건설한 아시리아의 고대 성읍이다.(창 10:11) 수메리아어로 “거룩한 문”이란 뜻의 갈라는 앗수르 북쪽의 티그리스 강변에 있는 니므롯은 벽돌로 만들어진 약 8㎞나 되는 성곽이 있고, 성문은 두께가 37m나 되었다. 10㎞ 떨어진 티그리스강의 물을 끌어들이기 위한 수로 시설도 발견되었다. 이곳에는 니누르타와 나부 신전이 발굴되었고 많은 조각과 그림이 그려져 있는 궁전과 약 43m의 높은 지구라트 잔해도 발굴되었다.

고대로부터 이라크는 노아의 후손이 바벨탑을 쌓기도 했다. 왜 요나가 니느웨로 가기를 거부했을까? 고대로부터 바벨탑을 쌓아 하나님을 대적하려고 했던 그야말로 인간의 교만이 머물렀던 땅으로 알려진 곳이라는 이유가 아니었을까?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는 바벨탑을 무너뜨리고 완고한 니느웨를 회개시켰다. 다시 이라크에 선교의 문이 열리면, 하나님의 은혜가 머물고 성령의 바람이 부는 은혜의 땅이 될 것이다.

소기천 박사

<장신대 성서신약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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