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음의소리] 수어는 언제부터 사용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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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어를 언제부터 사용하였는가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다. 하지만 여러 가지로 추정해 보면 아마도 원시인이 살던 고대부터 사용하였을 것으로 생각이 된다. 이때는 지금의 수어와 같은 문법적 체계가 완성된 형태로서의 사용은 아니었을 것이고 단순한 의사소통의 방법으로 사용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예를 들면 사냥을 하러 가는 경우 고함을 지르면 사냥감이 도망간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며 가까이 접근하기 위해서는 소리를 내지 말고 가야하고 또 목표물이 어디 있고 또 어떤 사냥감이라는 것을 손동작으로 동료들에게 알려주었을 것이다. 소크라테스도 크라틸루수(Cratylus)와 대화에서 “우리가 목소리를 낼 수 없거나 혀가 없으면 서로에게 무언가를 표현하고 싶을 때 지금 농인들처럼 손이나 머리, 신체를 움직여서 의사소통을 하려고 하지 않겠습니까?”라고 이야기한 것을 보면 수어는 필요에 따라 자연 발생적으로 생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체계적언 수어의 발전은 요즈음으로 말하는 가정수어가 한 부족이나 가정에서 사용되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미국 인디언들은 보면 다양한 부족들이 살 때 서로의 언어가 달라 의사소통의 어려움이 있었다. 따라서 그들은 음성언어를 부족 내에서 사용하지만 다른 부족들을 만날 때는 수어를 사용하여 소통을 하였다. 각기 다른 언어를 쓰는 부족이지만 서로가 만나 회의를 하거나 물물교환을 할 때 수어로 의사소통하며 이웃들과 소통하며 지냈다.

이러한 내용은 ‘Sign Language Among North American Indians’책에 자세히 서술되어 있다. 체계적인 수어의 발달은 어떠한 경로를 거쳐 왔을까? 현대적인 농교육이 발달되기 전에 중세에 귀족 집안에 태어난 농인 자녀들에게 유산을 물려주기 위해 교육이 필요하였던 것이 계기가 되어 그들을 교육하기 위해 음성언어를 사용하지 않고 수어를 사용하며 평생을 지내는 수도원에 농인 자녀를 보낸 것이 농교육의 효시로 보고 있다. 이는 개인적인 교육이었고 이후 체계적인 교육은 1760년 세계농교육의 효시인 파리 농학교 설립자 레페에 의해 실시되었으며 국내에는 맹교육보다 11년 늦게 1909년 로제타 셔우드 홀(Rosseta Sherwood Hall) 여사에 의해 농교육이 시작되었다. 이렇게 처음의 농교육은 수어를 중심으로 시작되어 농인도 교육을 받으면 일반인과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탈무드에서 농인은 자기 행동에 책임을 질 수 없으므로 권리와 의무에서 제외되며 청각장애(聾)나 언어장애(啞) 중 어느 한 가지만 있을 경우에는 권리를 인정하며 의무에서 완전히 제외되지는 않는다고 적혀 있다.

수어의 사용으로 체계적인 교육을 받은 이후 농인은 각종 분야에 진출하였으며 미국의 유명한 농인종합대학교인 갤로뎃 대학교에는 세계의 많은 농인 학생들이 공부하고 있다. 그곳은 현관의 수위부터 매점 직원, 학생처 직원 등 교수를 포함한 모든 교직원이 수어를 구사하여 이곳에 들어오면 언어장벽 없이 자유롭게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곳으로 마음껏 공부하며 교제하며 방과 후 활동과 동아리 활동을 할 수 있는 농인들의 세계이다. 말없이 수도생활을 하며 조용히 소리 없는 언어를 쓰는 수도사의 언행은 그 기본 바탕이 자신을 낮추며 상대방의 소리 없는 음성을 듣는 자세로부터 시작되지 않았나 생각해 본다. 아무런 소리를 정제 없이 하여 상대방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보다 침묵으로 지내며 꼭 필요한 말을 몸으로 하는 수도원을 생각해 본다.

안일남 장로<영락농인교회·사단법인 영롱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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