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싶은이야기] 잊히지 않는 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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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맹학교를 다닐 때, 그곳을 탈출하는 것만이 행복을 찾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나의 바람대로 결국 누구나 다 가고 싶어 하는 역사 깊은 다른 맹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 그러나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는 말처럼 그곳은 내 생각보다 살벌한 곳이었다. 선배들의 횡포와 억압은 너무도 무서웠다.
더욱이 그 학교에는 기독교인만 있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인이 아닌 사람도 많았다. 6.25전쟁 후 휴전협정이 이루어지고 얼마 되지 않았던 때라 살벌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뿐만 아니라 학교는 일본 사람들이 지어 놓은 건물이었기에 수도도 없었다. 선배들의 횡포로 아침저녁마다 교문 밖에서 양동이 두 개에 물을 길어와야 했고, 따뜻하게 데워서 선배에게 바쳐야 했다. 만약 후배가 그렇게 하지 않았다가는 군용침대 막대기로 인정사정없이 매를 맞아야 하는 무서운 곳이었다. 나는 이곳 또한 있을 곳이 아니란 생각에 매일 아침 가까운 교회에 가서 기도했고, 학교의 나무 밑에 앉아 나갈 수 있게 해달라고 계속해서 기도했다.

하나님께서 나의 기도를 들으시고 나갈 수 있는 기회를 주셨다. 나는 학교에 자퇴서를 내고, 즐겁고 기쁜 마음으로 방마다 찾아다니며 작별 인사를 했다. 남자 기숙사로부터 400m 떨어진 여자 기숙사에도 찾아가서 선후배들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인사를 나누기 위해 마지막 방이었던 선자의 방문을 두드렸다. 저학년이었던 선자는 노래도 잘하고, 음악도 잘하고, 얼굴도 예쁜 학생이었다. 선자 남매는 유전성으로 앞을 보지 못하였는데, 그녀의 오빠는 나의 선배였고, 오빠 역시 선량하였다.
선자의 방문을 두드리고 문을 열었다. 그런데 방에서 심한 악취가 나고, 아파서 앓는 신음 소리가 들렸다. 나는 “선자야! 나는 내일부터 이 학교에 안 나온다.” 하고 자퇴서를 낸 이야기를 하였다. 그때 선자는 나의 손을 잡더니 “선태 오빠, 내가 다시 살 수 있을까요? 저는 얼마 못살 것 같아요”라고 하였다. 그리고 어린 그 학생은 자신을 위해 기도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나는 부족할지라도 자매를 위해 짤막하게 기도해 주었다. 내가 떠나온 지 2주후, 그녀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복막염으로 아까운 자매가 세상을 떠난 것이다.

내가 안타까운 것은 이것이다. 만일 당시에 내 주머니에 돈이 있어 병원으로 데려가 진료를 볼 수 있었다면, 그녀는 조금 더 살 수 있지 않았을까? 아니면 아파서 내 손을 잡고 우는 자매를 대문 밖 가까이에 있는 가게에 가서 빵이나 호두 한 봉지를 사다가 안겨 줄 수 있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이 세월이 가면 갈수록 후회스럽다.
내가 그때 지금만큼 사회성이 있고 성숙했더라면, 병원으로 안내해 주었더라면 살 수 있었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아파하는 그에게 따뜻한 사랑을 베풀지 못한 것이 지금도 후회스럽다.
바울은 “기회가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라고 하였다. 기회가 있을 때, 여유가 있을 때, 혹은 비록 여유가 없을지라도, 누군가가 도움이 필요한 상황이 왔을 때 선한 일을 후회 없이 하자.

김선태 목사
<실로암안과병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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