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이슈]달란트대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사람들 (268)이수정 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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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정은 산상수훈 족자를 보고 즉시 붓을 들어 詩 한수를 써 츠다 센에게 내놓았다.
‘種德門 中見吉光 耕田自 在福田長 欣欣虛己 迎入處 更帳明朝各二方’ 해석하면 ‘種德門(농학교 안에서 생명의 빛을 찾았으니 마음대로 경작할 복된 밭이 끝없이 전개되도다. 기쁨으로 몸을 비어 맞아 주던 그 일을 밝은 날 아침 다시 생각한다면 그 슬픔이 오죽할 것인가)’ 이 詩는 11월 25일 칠일잡보(七一雜報)에 실려 일본 교계에 소개되어 일대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그리하여 일본 학계나 교계에서 얻은 영예와 지위가 커졌다. 이수정은 츠다 센과 만남으로 새로운 개화의 방안을 얻었다. 이수정이 츠다 센에게서 받은 영향은 그의 학자적인 인품과 신앙적 영향력이었다.
츠다 센(律田仙)은 1837년 7월 6일 佐倉城 內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藩校에서 배웠다. 에도(江戶)에서 手律藏의 문하에서 화란어와 영어를 배웠다. 1867년 25세 때 幕府의 군함 구입 때문에 미국에 가는 小野反五郞의 수행원으로서 워싱턴에 갔다. 재미 기간은 6개월이었다. 이 기간에 견문은 츠다 센에게 큰 전환이었다.
츠다 센은 ‘미국에서는 상투를 틀기에도 여간 어렵지 않기에 여기 상투를 잘라 보냅니다’라는 편지와 함께 고국에 우송했다. 가족들은 실신할 정도였으나 그 후 4년이 못 되어 단발령이 내리고 영어를 습득하는 세대로 바뀌고 말았으니 선견지명이 있었다.

6개 월 간의 미국 여행 중 츠다 센 박사는 무엇보다 농업이 합리적으로 시행되고 있다는 것과 국민의 평등의식에 큰 인상을 받은 바 있었다. 귀국 후 그는 유신 동란 때 관직을 사임하고 외국 여행객을 접대하는 호텔에서 일한 바도 있었다. 명치 6년에는 비인의 만국 박람회에 갔다 온 이후 ‘農業三事’라는 저서를 내놓았다. 그리고 명치 8년에는 일본에서 최초의 農學社 農學校를 창설하고 9년에는 ‘농업잡지’를 출간하였다.
츠다 센이 기독교인이 된 것은 둘째 딸 律田梅子가 미국에 유학하면서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이다. 이때 츠다 센 박사는 마침 비인의 만국 박람회에 참석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그 후에 둘째 딸이 미국에서 세례 받은 사실을 일본을 방문한 감리교 목사 줄리우스 소퍼(Julius Soper)에게서 들었다. 줄리우스 소퍼 목사 부부는 梅子의 선물까지 전달하였다.
또 다른 이유로는 츠다 센이 빈의 만국 박람회에서 세계 각국어로 성경이 번역되었다는데 놀랐다. 250여개 방언으로 번역되었다고 믿었다. 그 종교는 위대한 종교라고 확신하였다. 기독교에 관심을 갖고 돌아왔는데 소퍼 목사 부부의 방문과 둘째 딸의 세례 이야기를 들은 후 결심하고 소퍼 목사에게 세례를 받았다. 그는 모범적인 그리스도인으로 일생을 살았다. 이수정이 츠다 센 박사와 만남으로 기독교인이 되었다.

츠다 센은 1908년 4월 24일 72세로 세상을 떠났다. 4월 28일의 장례식 때 일본 감리교회 감독이며 아오야마 학원 원장을 지낸 혼다 요우이치(本多庸)목사는 장례식에서 “츠다 센 씨는 위대한 평민이다. 벌거벗겨 보아도 훌륭한 국민이다. 죄 있는 사람, 부도덕한 사람에게 동정심을 품고 있는 평민, 기독교적 평민, 천하 만민을 위하여 몸을 희생한 그리스도 안에 있는 평민이었다. 또 츠다 센의 종교는, 그의 사업 그대로이다. 그는 농학 전문가이며, 그의 종교는 농업과 비슷하였으며…. 확실하게 밭을 갈고, 풀을 뽑고, 비료를 주어 열매를 거두었다”고 말했다. 그 설교대로 츠다 센의 신앙은 많은 열매를 맺었다. 일본만 아니라 한국인에도 그는 신앙의 감화를 주어서 이수정을 기독교인이 되게 했다.

이승하 목사<해방교회 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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