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싶은이야기] 김포공항에서 일어난 해프닝(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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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장애인 선교를 시작하면서 지금까지 달려갔던 교회와 사회 기관들을 일일이 열거하자면 지면이 모자랄 것이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만난 교계와 사회 인사들 역시 일일이 거론하자면 한이 없을 것이다. 사역한 집회의 종류도 매우 다양했다. 이런 일들의 주된 목적은 어려운 시각장애인을 돕기 위한 사랑의 헌금 모금이었다. 1973년, 내가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산하 전도부 소속 맹인선교부 총무를 맡은 이후로 수년간 달려온 길들은 실로 험한 가시밭길과 같았다. 국내만 하더라도 전국 교회를 대상으로 집회와 간증 사역이 얼마나 많았던지 다 열거하기도 힘들지만, 그때마다 성령께서 인도하시고, 모든 분들이 합심하여 적극적으로 도움을 주었다.
내가 일본 소재 한국인 교회를 여러 번 방문했던 것은 대부분 총회 사역과 실로암안과병원에 필요한 장비 구입을 위한 선교헌금을 모으기 위해서였다. 첫 번째 방문만은 예외였는데, 당시 일본 내에서 실시하고 있는 시각장애인을 위한 사회보장제도나 재활훈련이나 사회적 인식 등에 관한 정보를 얻기 위해서였다.

나는 재일교단의 초청을 받고 어려운 과정을 거쳐서 일본에 갈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그 당시는 여권과 일본 입국사증을 받기가 매우 까다로웠던 시절이었다. 여권을 신청하려면 해당국으로부터 공식적인 초청장을 받아야만 했다. 그리고 반드시 하루 동안 소양교육을 받은 후 신원조회를 거쳐야 했다. 그 기간이 족히 3개월은 걸렸다. 여권을 받은 후에도 일본 입국사증 발급을 위하여 일본 법무성까지 가서 조회를 받아야 했고, 도합 반년은 걸렸다.
1975년 3월 19일, 이 모든 과정을 다 치르고 드디어 일본으로 떠나게 되었다. 내 생애 최초의 해외여행이었다. 나를 초청해 준 재일교단 대표자들과 일본 시각장애인전도협의회 임원들이 하네다 공항으로 나를 맞으러 나오기로 되어 있었다.
김포공항에서 출국에 필요한 모든 절차를 밟고 출입국관리소를 통과하려던 참이었다. 나는 여권을 내밀었다. 그런데 담당 직원은 여권을 보더니 내가 시각장애인임을 확인도 하지 않은 채 병역미필자라 하여 출국을 허락하지 않았다. 분명히 여권 뒷면에 ‘시각장애인’이라는 표시가 있었고, 주민등록증에도 ‘장애인’이라는 증명이 있었는데도 말이다.

김선태 목사
<실로암안과병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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