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돌아 본 삶의 현장] 내가 책임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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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드라마를 보면 가난한 남자가 돈 있는 집 처녀를 원할 때 용감히 그 처녀 집 부모를 찾아가 무릎을 꿇고 “따님을 제게 주십시오. 제가 책임을 지겠습니다”라고 말하는 장면을 볼 수 있다. 장인 될 분은 그놈 배짱 한번 좋다고 호감을 보이는가 하면 장모 될 분은 돈이 있느냐 직장이 있느냐고 반대를 한다. 그런데 청년이 말한 것을 생각해 보자. 무엇을 책임지겠다는 것인가? 먹여 살리는 것? 행복? 생명? 참으로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또 부모 쪽도 마찬가지다. 무엇을 책임지겠다고 하는지 제대로 이해는 한 것인지, 배짱이 좋다는 등 청년의 현재가 불확실하다는 이유 등으로 딸을 물건 인도하듯 흥정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생각이 너무 천박하고 평면적이다. 

나는 아내와 결혼하기 전,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던가 생각해 본다. 제대를 앞두고 연애하고 있던 아내와 만나고 싶다고 편지를 했다. 장인 되는 분은 목포에서 한 무진회사를 책임지고 있었는데 그녀는 그곳에 기거하고 있었다. 원래 장인은 일제하에서는 장흥, 진도 지방에서 군수로 지내고 있다. 그러다가 일제 말에 과감히 그 일을 그만두었는데 해방이 되자 금융업을 좀 맡아 달라는 청을 받았던 것 같다. 이 금융회사는 서민들을 위한 소위 상호신용금고와 같은 것이었는데 폐해가 많아 후에 국민은행으로 병합되었다고 한다. 어떻든 비가 오는 날이었는데 그곳에 찾아갔다. 그런데 여자는 출입이 허락되지 않아 밖에는 못 나와서, 그녀의 방에 들어갔다가 장인 될 분을 만나 혼난 기억만 있다. 과년한 처녀 집에 군인이 찾아다닌다는 소문이 나면 어떻게 되겠냐며 다시는 찾아오지 말라는 호통이었다. 나는 당시 대학 3학년에 편입해서 다니다가 군에 입대했고, 가정이 어려워 당장 결혼할 처지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때 나도 무릎을 꿇고 앉아 “따님을 주십시오. 제가 책임지겠습니다”라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것 같다. 어떻게 해서 허락을 받았는지 지금은 60년이 가까운 일이라 까마득해서 기억이 없다. 

결혼 후 55년이 지난 어느 날 나는 아내가 언어장애가 오고 손에 힘이 없어 젓가락질을 제대로 못 하겠다고 해서 놀랐다. 혹 뇌졸중인가 해서 교회를 다녀온 주일 오후에 대학병원 응급실에 들렀다. 그랬더니 뇌출혈이 있어 격막하출혈(膈膜下出血) 수술을 급히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두 달 전 빙판에서 넘어져 뇌를 다쳤는데 그때 CT를 두 번이나 촬영했는데 아무 이상이 없었다. 그래, 지금까지 정상 활동을 해 왔는데 뇌막과 뇌 사이에 모세혈관에서 조금씩 출혈이 되어 피가 쌓여 뇌를 압박하고 있어 언어장애가 온 것이라는 말이었다. 

의사는 나를 앉혀 놓고 설명했다. 두개골에 구멍을 뚫고 혈종에 배액도관을 삽입해 쌓인 피를 빼내는 수술이라고 했다. 이를 위해 전신마취를 해야 하는데 나이가 80이 넘어 소생이 안 되면 산소호흡기를 끼울 수도 있다. 피가 한 군데만 있는 것이 아니고 여기저기 있는데 다 빼낼 수 없으므로 앞으로 또 다른 곳에 피가 누적되어 재수술할 수도 있다. 지금 빼낸 곳에도 또 출혈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각오해야 한다. 이렇게 설명을 한 뒤 다 알았으면 동의한다는 사인을 하라고 아이패드(iPad)를 내밀었다. 지금은 수술동의서가 이렇게 바뀐 것이다. 결국, 병원은 최선을 다할 뿐 책임은 지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그래도 나는 손가락으로 서명했다. 나는 수술실에 그녀를 보내 놓고 얼마나 초조했는지 모른다. ‘책임은 내가 지라는 말이 아닌가?’ 대기실에서 ‘수술 준비 중’, ‘수술 중’, ‘회복 중’ 이런 전광판이 나타나는 동안 나는 온전히 우리 두 사람을 하나님께 맡기고 있었다. 진정 삶과 생명과 행복을 책임질 수 있는 분은 하나님뿐이었다. 내가 책임을 진다고 공언하는 것이 아니고 “나는 하나님을 믿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다.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사 43:1)

오승재 장로 

•소설가

•한남대학교 명예교수

•오정교회

오승재 장로 <seungjaeoh@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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