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 믿음으로 한국 땅에 뛰어든 배위량 목사 (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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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위량의 제 2차 순회 전도 여행 (54)

구미에서 상주까지 (2)

구미시의 동쪽에 위치한 해평면의 면적은 69.23㎢인데 낙동강의 동쪽에는 군위군 소보면, 남동쪽의 산동읍, 남서쪽의 선산읍, 고아읍과 북쪽으로 도개면과 경계를 이룬다. 해평에는 남으로 대구, 동으로는 포항 그리고 북으로는 상주와 안동으로 이어지는 국도가 놓여 있다.
이제 다시 구미 해평에서 상주 낙동까지의 순례에 대한 이야기로 방향을 돌리고자 한다. 필자가 구미시의 공단 터미널에서 내려서 처음으로 산호대교에서 시작하여 해평->구미보->낙단보->낙동으로 도보 순례를 나섰을 때 처음에는 아무 것도 손에 잡히는 것이 없어 그저 막막했다. 지도 한 장 들고 구미 산호대교를 찾아 갔고 그곳에서 낙동강 동안(東岸)에 형성된 제방 위에 만들어진 길을 따라 걸었다. 구미에서 상주로 향해 도보 순례를 하는 동안 해평을 지나가면서 이곳은 배위량 선교사가 잠을 잔 곳이구나 감탄하는 마음을 가졌지만, 그가 어디서 잠을 잤는 지에 대한 흔적은 찾지 못했다.
해평에서 바라보면 낙동강 서쪽 건너편에 보이는 구미 시가지가 지척의 거리에 있다. 강 건너 구미 지역은 완전한 시가지인데, 동쪽 해평땅은 완전한 농촌 지역이다. 언젠가 필자는 이른 새벽밥을 먹고 새벽에 대구에서 구미행 고속버스를 타고 공단 주차장에 내린 후 구미 산호대교 동쪽 편에서 상주시 낙동면을 향해 걸어갔는데, 그날 따라 아침 해가 너무 더웠다. 아침이지만, 더워서 물을 마시다 보니 얼마 가지 않아 가져온 물이 동이 났다. 그때 낙동강 제방에서 마음 넉넉한 아저씨를 한 분 만났는데, 그분에게 “지금 저는 구미에서 상주 낙동까지 걸어서 가는 길인데, 가져온 물이 다 떨어졌습니다. 수돗물을 먹을 수 있는 휴게소가 인근에 있습니까?”하고 질문하니 “근처에 매점이나 휴게소가 없어 물을 구할 수가 없다”고 한다. “이렇게 걸어가면 목이 마를텐데, 이것이라도 드시라”고 하면서 싱싱한 오이를 하나 건네 준다. 그분은 해평면의 동쪽 지역인 산동면에 사는데 귀촌하여 농사를 짓고 있다고 하였다. 그 오이는 자기가 직접 농사를 지은 것이었다. 그는 구미가 도시와 농촌의 기능을 다 갖춘 지역으로 도시의 문화생활도 누릴 수 있고 농촌의 아늑함도 누릴 수 있다고 하면서 귀촌하여 살기에 좋은 고장이니 나중에 퇴직하면 구미에 와서 살면 좋을 것이고 하셨다. 평화로운 지역에 사는 평화로운 마음을 가진 사람을 만나는 나그네는 행복하다.

무게도 있고 하여 필자는 아침에 집에서 순례를 나설 때 통상 0.5리터짜리 페트병 두 개에 물을 담아 온다. 그것을 아껴서 마시고 모자라면 현지 조달한다. 그러나 더운 날에는 반나절만에 물이 동이 난다. 그러면 현지 조달할 방법을 속히 찾아야 한다. 구미에서 상주 낙동으로 가던 그날도 초여름 날씨의 따가운 햇빛과 갈증으로 가져온 물이 반나절 만에 동이 났다. 그 위기 상황에서 산책 나온 지역민이 자기 먹으려고 가지고 온 싱싱한 오이를 한 개 선물하여 그 오이를 먹으면서 갈증을 해결할 수 있었다. 이 이야기는 하나의 아름다운 추억거리이고 행복한 기억이 되었다.
세상을 아름답다고 볼 것이냐 힘든 고해로 볼 것이냐는 물론 환경과 상황에 따라 다르겠지만, 사람이 그 환경과 상황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이는가에 따라서도 많이 달라지리라고 생각된다.
먼길을 걸을 때는 여러 가지 지나온 길이 생각이 나기도 한다. 1978년에 필자는 ROTC 훈련을 받은 후 소위로 임관하여 광주의 보병학교에서 훈련을 받았다. 그때 광주에서 지리산 노고단까지 완전 무장한 몸으로 행군을 했다. 그 행군길에 장성으로 가서 유격 훈련도 받고 하면서 두 주간 동안 마지막 훈련 코스로 먼 길을 행군한 것이었다. 산을 넘기도 하고 군복을 입고 군화를 신은 차림으로 강을 건너기도 하고 밤에는 텐트를 치고 잠을 자면서 행군을 했다. 목적지까지 가야될 상황에서 산을 넘어갈 때는 너무 피곤했다. 무엇보다 견디기 힘든 것은 초여름의 더위에 너무 목이 갈하여 작은 수통에 담아온 물이 동이 날 때였다. 그때 목이 갈했던 어떤 동료들은 모네기를 마치고 물을 가두어 둔 논에 머리를 박고 물을 먹는 일도 있었다.

필자가 이렇게 먼 길을 걷고 순례하고자 하는 동력을 가지게 된 것은 어린 시절 학교에 가기 위해 우리 마을에서 십리 밖에 있는 학교를 매일 걸어 다닌 것이 중요한 경험의 출발점인 것 같다. 그리고 광주에서 지리산 노고단까지 완전무장한 몸으로 두 주간 행군하면서 낙오하지 않고 모든 훈련을 소화하며 끝까지 걸어서 노고단에 오르는 것이 중요한 경험이 된 것 같다. 그리고 독일 유학 시절 양식을 아껴 먹어야 할 처지라 설교하는 교회에 가기 위해 반 정도의 길을 기차를 타고 다니면서 나머지 반 정도의 길은 걸어서 다녔다. 그때 걸어서 하루 동안 간 길이 왕복 약 100리 정도 된다. 그 길을 걸어 다닌 경험이 배위량 길을 찾고자 하는 일에 필자가 나서는 중요한 동력이 되는 것 같다. 그때 조금이라도 길을 줄이고자 지름길인 산길을 통해 갔는데, 그렇게 지름길로 가면 길을 많이 단축하였기에 제때 기차를 탈 수 있었고 예배에 늦지 않게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런데 여러 번 산속에서 길을 잃기도 했다. 한 번은 산과 들이 눈이 너무 많이 온 뒤였는데, 산속에서 목표로 하고 다녔던 표시를 찾을 수 없어 길을 잃어 앞을 봐도 눈 덮인 산, 뒤를 돌아보도 눈 덮인 산 온통 눈밖에 보이는 것이 없었다. 앞이 캄캄했다. 달랑 지도 한 장밖에 없는데, 주위에 사람도 인가도 없는 산중이었다. 그 절망의 순간에도 예배 시간은 점점 다가오고 속이 타들어 갔다. 그때 할 수 있는 게 “예배에 늦지 않게 해 달라”는 기도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 기도가 끝나고 얼마 후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그 산중에 지프차를 타고 산책을 나온 분이 있었다. 손을 들어 차를 세우니 차가 섰다. “제가 교회에 가서 설교를 해야 하는데, 이 산 중에서 길을 잃고 이렇게 헤매고 있습니다. 나를 가까운 큰 길까지만 데려다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말하니, 그분은 정말 친절히 신작로까지 나를 태워 주셨다. 그 신작로는 늘 지나다닌 길이었기에 방향을 알고 있었고, 길을 찾을 수 있으니 늦지 않게 기차역까지 갔고 기차를 타고 목적지까지 시간 안에 갈 수 있었다.

또 어떤 때는 독일 지역에 강한 한파가 몰아쳐 영하 20도 이하의 한파 속에서 셈멜빵에 버터를 칠하여 아침 식사로 두 개를 먹고 셈멜빵 두 개를 점심 도시락으로 싸서 길을 나섰다. 그 날은 너무 추웠기 때문에 좀 더 늦은 시간에 걸으면 덜 추울 것 같아 우선 튀빙엔에서 기차를 타고 가서 플록힝엔 역 바로 앞 역에서 내려 괴핑엔까지 걸어가기로 했다. 기차 역에서 내려 산을 넘어 갈 때 개울을 건너가야 되었는데, 너무 추워 세포 하나하나까지 얼어붙는 것 같은 공포가 몰려 왔다. 그때 무슨 용기가 났는지 그래도 포기하지 않았고 그 개울을 따라 난 길을 걸었다. 그리고 작은 나무다리를 건너기도 했다. 개울을 따라 걸어갈 때는 너무 추웠다. 산을 넘어갈 때는 눈에 미끄러지기도 하면서 갔는데, 이렇게 걷다보니, 나중에는 몸에서 열이 나고 땀이 나기도 했다.
필자에게 있는 것은 어떤 특별함이 아닌 것 같다. 단지 삶의 순간순간에 경험하고 그 순간에 함께 하신 하나님께서 지켜주심에 대한 확신이 있었다. 그렇기에 그런 확신으로 산티아고 길에도 도전했다. 그리고 산티아고 길의 경험을 살려 “배위량이 개화기에 걸으며 전도한 길을 두 번째 산티아고 길이 되면 얼마나 좋을까!” 희망하면서 그 길을 찾고 싶어하고 또 걷고 있다.

배재욱 교수
<영남신학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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