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주의 강단] “구원 받은 그리스도인의 삶” <삼상 6 : 6 ~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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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이토록 아름다운 세상이, 왜 이렇게 타락했습니까? 축복으로 가득차야 할 세상에, 왜 이렇게 재앙이 많습니까? 의인은 왜 한 사람도 없습니까?(롬 3:10)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 죄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 죄 때문에, 인간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형벌을 받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 죄를 지고(요 1:29) 십자가 위에서 피 흘려 죽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채찍에 맞으실 때, 가시 면류관을 쓰실 때, 십자가 위에서 못에 박히고 옆구리를 창으로 찌를 때 피를 흘리셨습니다. 예수님의 피는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구원받게 하는 구속의 보혈입니다. 예수님의 피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는(요 1:12) 보혈입니다. 예수님의 피는 성경에 약속한 축복을 받게 하는 보혈입니다. 예수님의 피는 질병을 치유하고 마귀를 물리치는 보혈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예수님의 피로 믿는 자에게 구원얻는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을 통해 구원받은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기쁨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큰 사랑으로 은혜로 구원 받은 그리스도인의 삶은 어떠해야 합니까?

본문의 내용은 블레셋에 빼앗겼던 법궤가 이스라엘로 돌아오는 장면입니다. 이스라엘에게서 빼앗은 법궤를 아스돗에 있는 다곤 신에게 바쳤습니다. 그런데 다곤 신상이 부서지고 사람들에게 독한 종기가 번졌습니다. 두려워 법궤를 가드로 옮겼고 그곳에서도 재앙이 발생했습니다. 또 다시 에그론으로 벱궤를 옮겼으나 역시 질병과 사망의 재앙이 임했습니다. 이에 놀란 블레셋 사람들은 하나님의 법궤를 이스라엘로 돌려보내기로 했습니다. 비록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법궤를 대하는 모습이지만 이 모습 속에서 그리스도인의 참된 헌신의 삶의 모습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재앙을 피할 해결책으로 블레셋 방백의 수대로 금 독종 다섯과 금쥐 다섯을 준비하고, 두 마리의 암소와 수레를 준비하여 하나님의 법궤를 이스라엘로 실어 보내기로 합니다. 

“그 송아지들은 떼어 집으로 돌려보내고”(7)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법궤를 메고 가는 소는, 젖을 먹여 키워야 하는 어린 새끼 송아지가 있습니다. 새끼에게 젖을 먹여야 하는 암소가, 떨어지기가 싫어 울부짖는 어린 송아지 새끼를 떼어 놓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헌신하는 자는 마음 아픈 선택을 해야 합니다. 가족을 생각하면서 인정에 얽매여 흔들리면 하나님께 참된 헌신을 할 수 없습니다.

“그 사람들이 그같이 하여 젖 나는 소 둘을 끌어 다가 수레를 메우고”(10)라고 말씀합니다. 새끼를 떼어 놓고 끌려온 암소에게 사람들이 수레를 메웠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자기가 선택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 하나님께서 메워 주시는 것을 할 뿐입니다. 그것이 참된 헌신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께서 메워 주실 때, 순종하고 나가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헌신하는 올바른 자세입니다.

“암소가 벧세메스 길로 바로 행하여 대로(大路)로 가며”(12)라고 말씀합니다. 두 암소는 울면서 좌우로 치우치지 않고 벧세메스로 갔습니다. 하나님께 헌신하는 자는 이런 모습이어야 합니다. 헌신하는 자는 좌우로 치우치지 않고 목표를 향하여 똑바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섭리와 인도하심이 있었습니다. 헌신하는 자가 경험이 부족하고 서툴지라도 흔들리지 않고 똑바로 나아갈 때 하나님의 도우심, 보호하심, 인도하심이 있습니다.

“수레가 벧세메스 사람 여호수아의 밭 큰 돌 있는 곳에 이르러 선지라”(14上)라고 말씀합니다. 암소의 고삐를 붙잡고 끄는 사람이 없이 두 마리의 암소만 갔습니다. 이끄는 사람도 없는 두 암소가 벧세메스에 정확하게 도착하여 선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은 부족해도 넘쳐도 문제입니다. 헌신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만큼 감당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 헌신하는 자의 자세입니다.

“무리가 수레의 나무를 패고 그 암소들을 번제물로 여호와께 드리고”(14下)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법궤를 수레에 메고 왔던 두 암소는 결국 하나님 앞에 번제물로 드려졌습니다. 하나님의 법궤를 운반하는 사명을 완수한 암소에게 보상은커녕 죽음이었습니다. 힘써 끌고 온 새 수레를 패서 장작 삼아, 하나님 앞에 번제물이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애써 수고한 대가가 비록 번제물로 드려지는 결과일지라도, 감당해야 하고 순종해야 합니다. 두 암소가 희생되어 하나님께 번제물로 드려진 그 자리는 영원한 기념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헌신하는 성도의 마지막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다가, 복음을 증거하다가 마지막에 순교의 제물이 된 순교자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 구원 받은 성도에게, “죽도록 충성하라”(계 2:10)고 말씀하십니다. 이 어려운 때에 십자가 희생으로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 충성으로 헌신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법궤를 메고 벧세메스로 가는 두 암소의 모습처럼 헌신해야 합니다. 하기 싫어도, 가기 싫어도, 목적지를 바라보고 묵묵히 헌신해야 합니다.

롬 8:18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최대중 목사

<땅끝노회 전노회장·총회 부흥전도단 부단장·해남고당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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