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돌아 본 삶의 현장] 세례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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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결혼한 이듬해 1960년은 우울한 해였다. 이승만 대통령의 3·15 부정선거가 있던 해였기 때문이다. 1954년에 소위 4사 5입 개헌을 하고 3대 대통령이 된 그분은 이해 3월에 다시 4대 대통령을 꿈꾸고 자유당 정·부통령 후보로 이승만과 이기붕이 입후보 등록하였다. 우리나라는 오랫동안 왕정으로, 벼슬아치로 등용된 양반만 권력을 휘두르고 서민을 괴롭혀 왔던 나라다. 양반은 토지를 독점하고 종으로 소작인을 거느리며 부와 권력을 독점하고 있었다. 나라가 독립되고 계급이 타파되며, 토지 분배로 지주의 횡포가 없어졌지만, 권력에 빌붙어 야욕을 독식하려는 국민의 습성은 버릴 수 없는 듯했다. 대통령의 그늘에서 권력에 맛들인 무리들은 자유당으로 뭉쳐 다시는 정권을 내놓지 않고 영구집권할 생각이었다. 대통령이 80이 넘자 임기를 못 채울 수 있다는 우려로 이기붕 부통령까지 당선시킬 생각인 것 같았다. 야당 도시인 광주는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출마한 조병옥 박사가 이번에는 대통령이 되기를 학수고대했지만, 그는 몸이 약해 도미 수술했으나 2월 16일 서거하였다. 시중에는 다음과 같은 노래가 유포되었다.

가련다 떠나련다 해공선생 뒤를 따라/ 장면 박사 홀로 두고 조 박사는 떠나간다./ 머나먼 타향 길에 객사 죽음 웬 말이냐?/ 서름 어린 신문 들고 백성들은 울고 있네.// 세상을 원망하랴 자유당을 원망하랴/ 춘삼월 십오 일에 조기 선거 웬 말이냐?/ 가도 가도 끝이 없는 당선 길은 몇 구비냐?/ 자유당에 꽃이 피네 민주당에 비가 오네.

서거 전날 전국 2학년 이상은 ‘우리 리 대통령’이라는 제목으로 글짓기 대회를 해서 시상하라는 명령이 있어 나는 부속 중학 학생 1,300명을 대상으로 글짓기를 시켜 심사하고 시상 준비를 하느라 밤잠을 잘 수가 없었다. 박철웅 총장이 자유당이어서 교사들은 모두 가정방문을 하여 학부모들의 당 성분 조사를 하여 보고해야 했다. 나는 우울할 뿐 아니라 이 학교를 떠나고 싶었다. 이렇게 정치에 휘말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전주의 기전여중·고에서 수학교사를 뽑는다는 광고가 났다. 내가 호기심을 가진 것은 이 학교는 교장이 외국 선교사이기 때문에 정치에 흔들리지 않은 학교라는 것이었다. 나는 임신한 아내를 위해서라도 제대로 대접받는 학교의 선생이 되고 싶었다. 그러나 문제는 제출 서류에 세례증을 첨부하라는 것이었다. 나는 포기하고 있었다. 4대 대통령 선거일에 투표하고 나서 나는 학교로 돌아와 학교신문 원고를 정리하고 있었다. 이때 장○○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다방 ‘판문점’에서 만나자는 것이었다. 술을 먹고 내가 세례증이 없다고 투정한 지 일주일이 지난 뒤의 일이었다. 그때 일이 미안하기도 해서 그날은 내가 저녁을 살 요령으로 다방에 나갔다. 친구 장○○은 자리에 앉자 물었다.

“누구에게 찍었냐?”
“난 네가 궁금하다. 양다리를 잘 걸치는 명수인 네가 이번엔 어디에 다리를 걸쳤는지.”
“나야 뻔하지. 승부를 정해 놓고 무슨 지랄인지 모르겠다.”
그리고 그는 어디서 들었는지 4할은 무더기 표를 넣을 것이고, 시골에서는 3인 1조를 짜서 서로 감시하고 해서 승부는 이미 났다는 것이었다. 그는 세상이 썩었다고 한참 지껄여 대더니 편지 봉투 하나를 내 앞으로 내밀었다.
“네 세례증이다. 가서 잘하고 네 본색이나 드러나지 않게 조심해라.” 얼떨떨 하는 내게 그는 말했다. “묻지 말고. 내 성가대원 가운데 목사 아들이 있어. 하나 해 오라 했지 뭐.”
“그래도 되는 거야?”
“나도 모르지. 아무튼, 한마디 했더니 금방 해 와서 나도 어리둥절해. 이제는 너에게 달렸지 뭐. 네가 망나니가 되면 나쁜 짓이고 또 아니? 너 같은 놈도 착실한 신자가 될지. 그러면 한 사람 건진 거지 뭐.”
이렇게 해서 나는 기전여중·고에 서류를 넣게 되었다.

오승재 장로
•소설가
•한남대학교 명예교수
•오정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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