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3.1운동 유적지를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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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씨 희망을 키우다”

유관순에 독립의지 심어준 정신적 스승
앨리스 H. 샤프(Alice J. Hammond Sharp) 선교사

올해는 1919년 3.1운동 102주년이 되는 해이다.
102년 전 전국 방방곡곡이 독립운동의 열기로 가득했던 그날을 생각하며… 충남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 탐원리 338-1 유관순 열사 사적지를 찾았다. 일제의 침략에 항거하다 순국하신 유관순 열사를 비롯한 많은 애국지사들의 숭고한 뜻을 기리기 위해 마련된 곳이다.

전시관을 둘러보던 중 유관순 열사에게 신앙으로 인도하여 독립의 식을 심어준 스승 ‘믿음의 어머니’ 앨리스 샤프 선교사가 눈에 들어왔다. 뉴욕 브루클린 선교학교를 졸업하고 1900년 미국연합감리회 파송을 받아 한국 땅을 밟은 당시 29세였던 앨리스 샤프(1871~1972), 한국이름 사애리시(史愛理施) 선교사는 1919년 3·1운동의 상징인 유관순 (柳寬順,1902.12.16~1920.9.28) 열사에게 독립의식을 심어준 스승이다. 그는 1910년 충남 천안 병천면 지령리교회(현 매봉교회)에서 유관순을 만났다. 그는 나이가 어렸지만, 신앙심이 깊고 영리했던 유관순을 눈여겨보다 수양딸로 삼고 공주로 데려가 영명학당을 2년 동안 다니게하고 1916년 서울 이화학당 보통과 3년에 교비생으로 편입시키고, 1918년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에 입학시키는 등 여성 지도자로 키우게 된다. 그는1904년 이화학당에서 캐나다 출신 로버트 샤프 선교사와 결혼한 뒤 충남 공주에 선교기지를 세우고 샤프 선교사 부부는 교육 선교와 여성 지도력 양성에 일생을 바쳤다. 남편 샤프 선교사는 1906년 순회전도 도중 진눈깨비를 피해서 들어간 집이 상여가 보관된 곳이었고, 전날 장티푸스로 죽은 시체를 운구했던 상여를 만진 것이 화근이 되어, 1906년 3월 5일 34세의 젊은 나이로 별세했다. 우리는 지금의 코로나 시대에 살고 있다. 당시 선교사의 감염병 전염으로 생을 달리한 상황이 상상이 간다. 사애리시 선교사는 남편 로버트 샤프 선교사가 먼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후에도 자녀도 없이 홀로 사역을 계속하다 1940년 일제에 의해 추방됐다. 그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은퇴선교사요양원에서 지내다 1972년 9월 한 세기 동안 선교사로의 삶을 마감하고 101세의 일기로 별세했다.

샤프 부부 선교사의 한국에서의 사역을 살펴보면 1905년 공주로 이사하여 남편 샤프 목사는 남학생을 위한 명설학당을 개설하고, 부인 샤프 선교사는 여학생을 위한 명선학당을 개설하여 학생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공주의 첫 근대 학교였다. 지금의 공주 영명중·고등학교를 비롯해 강경 만동여학교, 논산 영화여학교 등 9개의 여학교와 7개의 유치원을 설립했다. 사애리시 선교사는 이 땅에 사람을 키우며 어둠에 교육의 불꽃을 밝힌 선교사였다. 충남 지역의 어르신들에게는 신앙을 심고 믿음의 어머니로 선생으로 아름다운 추억을 남기며 복음을 선물한 선교사이다. 3.1독립만세운동 102주년을 돌아보며 미래세대를 이끈 신앙정신을 배우고 선교사들의 행적을 계승하며 그들을 잊지 않고 기억해야 건강한 교회를 세워나갈 수 있을 것이다.

불꽃같은 삶을 살다 간 18세 소녀를 추모

기념관 위쪽에는 깨끗하게 조성된 추모각이 있었다. 이곳 추모각에서는 매년 열사의 순국일에 맞춰 ‘유관순 열사 추모제’가 거행된다고 한다. 유관순 열사 순국 95주기를 맞아 독립운동을 주도한 유관순 열사의 애국심을 고취하기 위해 대한민국 해군의 214급 잠수함 중에 ‘유관순 함’ 이름이 붙여졌다. 여성의 이름이 함정 이름으로 명명된 것은 ‘유관순 함’이 현재까지 전무후무하다.

유관순 누나 생가

유관순 유적지 인근에 커다란 나무 아래 1902년 12월 16일 열사가 태어난 초가집 생가는 애국정신을 기리기 위해 옛 집터에 생가를 복원했다. 생가 옆쪽에 작은 비석에는 ‘서대문 형무소에서 복역하면서도 밤낮없이 옥중 투쟁을 계속하다가 일천구백이십년구월 이십팔일 크고 빛난 우리의 별은 이 땅 위에서 빛을 거두고 말았다’는 비문이 새겨져 있다.
생가 바로 옆에는 유관순 열사가 다녔던 매봉교회가 있다. 비대면 시대에 문이 잠겨 입구에서 기도 하고 돌아섰다. 나라 잃은 설움에서 나라를 구원한 선조들이 있어 지금 우리가 자유를 누리고 있다. 102년 전 삼일 독립만세운동의 함성소리가 있었던 그곳을 찾아 애국정신과 순국선열들의 넋을 추모하는 의미 있는 시간을 가져본다.

▲유관순 누나 생가

아우내 장터 독립만세운동을 주도

휴교령으로 인해 고향에 내려온 3월 31일 용두리 매봉산에 봉화를 올렸고, 주변 24개 지역에서도 일제히 봉화를 올려 호응하였다. 4월 1일 조인원이 독립선언서 낭독을 하고 유관순을 필두로 3천여 명의 군중들은 태극기를 앞세우고 독립만세운동을 전개 하였다. 이때 일본 헌병들은 이들을 향해 일제히 사격을 가하여 유관순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포함해 19명이 순국하고, 30여 명이 부상을 당했다. 아우내장터 독립운동 주모자로 서대문형무소에 유관순은 수감되었으나 옥중에서도 끝까지 “독립만세”를 외쳤다. 옥중 만세운동을 선동했다는 이유로 그는 심한 고문을 당하였다. 고문 중에 열사는 “나는 우리나라가 독립되는 그 순간까지 죽는 한이 있더라도 만세를 부를 것이오”라고 했다. 결국 1920년 9월 28일 유관순 열사는 특별사면령으로 출소할 수 있는 날을 이틀 앞두고 숨을 거두었다. 열사의 애국정신을 기리기 위해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됐다.

▲기념우표

 

“끌 수 없는 불꽃”

제암리교회 학살 사건의 진실을 밝힌 등불
스코필드(Frank W. Scofield) 석호필 선교사

 

▲스코필드 선교사

제암리 학살현장 사진을 촬영하여 일제의 만행을 세계에 알린 캐나다 선교사 스코필드 (Frank W. Scofield), 한국명 석호필(石虎弼) 박사를 기념하기 위해 경기도 화성시 제암리 3.1운동 순국 기념관 광장에 있는 석호필 선교사의 기념조형물 앞에 서서 존경의 마음
으로 사진을 담는다. 선교사 스코필드 박사는 일제의 감시를 피해 소아마비로 불편한 몸을 이끌고 한손으로 자전거를 타고 제암리로 향했고 모국도 아닌 타국 땅에서 목숨 바쳐 몰래 사진을 찍으며 학살 현장을 기록하여 일제의 비인도적 침략 행위를 국외로 알리며 독립선언 민족대표 33인 외에 34번째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1916년 아내와 함께 한국에 와서 세브란스 의전에서 4년간 세균학, 위생학 강의를 하였고 당시 ‘석호필’이란 한국 이름을 지었다. 우리는 코로나 시대에 살고 있다. 당시의 한국은 일제 강점기에 백신도 없이 위생관념이 없을 때 석호필 선교사는 이미 당시에 팬데믹을 예측이나 한 듯이… 방역을 위해 애쓴 분들 중에 한분이었던 것 같다. 스코필드 박사가 서른이 되던 해, 나라 잃은 설움은 가시지도 않은 채 1919년은 밝아왔다. 기미년 3월 1일 오후 2시. 무언가가 일어날 것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던 스코필드 박사는 자기가 할 일을 치밀하게 계획하고 탑골공원 먼 언저리를 서성거리며 카메라를 메고 재빨리 함성이 들려오는 공원 정문을 향해 건너갔다. 그는 태극기와 함성의 대열을 향해 카메라의 셔터를 누르며 기록을 남겼다. 그 후 4월 제암리 학살사건이 일어난 생생한 사건의 현장… 이 때다! 하고 재빨리 양복 안쪽에 숨겼던 카메라를 꺼내어 일제의 감시를 피해 제암리교회를 향해 빠른 셔터를 눌러 역사의 순간을 사진으로 남겼다. 그야말로 특종 사진이다. 이 순간이 바로 스코필드 박사만이 찍을 수 있었던 학살 현장의 역사적인 다큐멘터리 사진이 되었다. 교회 안에 사람들을 몰아넣은 뒤 불을 질러 학살한 일제의 제암리 양민학살 사건 현장을 직접 촬영한 스코필드 박사는 구두 밑창을 뜯어서 필름을 넣고 현장을 빠져나와 일제의 만행을 온 세계에 알렸다. 그가 있었기에 오늘이 있다고 생각한다. 잿더미로 변한 마을은 참혹했다. 그곳의 현장은 사진으로도 기록하기 두려울 정도였다. 하지만 그는 세상 밖으로 나갈 진실을 알리기 위해 한순간이라도 놓칠세라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스코필드 박사는 현장을 돌아다니면서 양민들에게 응급처치를 해주고 사체를 수습하기도 했다. 이렇게 촬영된 스냅은 그 후 그의 손으로 국외에 널리 소개되었으며 일본의 만행을 폭로하는 결정적인 구실을 했다. 당시 그가 사용한 카메라는 ‘롤라이플렉스 Rolleiflex’란 기종으로 추정된다. 필름을 감아 사용하는 2안 리플렉스 카메라(twin-lens reflex rollfilm camera)로 셔터 소리를 최소화 하여 찍을 수 있는 카메라였기 때문이다. 필자는 사진가로서 기자로서 스코필드 박사를 최고의 사진가로 존경하는 분으로 기억에 남기고 싶다. 1920년 독립선언 발표 일주년 기념만세를 부르고 “끌 수 없는 불꽃”이라는 책을 출간하여 일제의 만행을 세계에 알렸다. 1960년에 대한민국 문화훈장을 받은 석호필(石虎弼) 이라는 한국 이름을 가졌던 의료선교사. 그는 1970년 부활절을 이틀 앞둔 4월 12일 81세의 일기로 영면하고 4월 16일 오후 2시 서울 남대문교회에서 광복회 주관 사회장으로 영결식 후 지금의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그의 평생소원대로 한국 땅에 안장되었다. 순간의 사진으로 나라를 찾는 위대한 역사의 기록을 남겨 주신 님. 모국보다 더 한국을 사랑한 선교사의 희생과 나라를 지켜온 선조들의 고귀한 정신을 기리며 2021년 3.1독립만세운동 102주년을 맞이하면서 선교사들의 희생에 감사와 존경의 마음을 담는다.

/구성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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