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고통에 대한 예술적 승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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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나는 순간부터 우는 존재가 인간이다. 짐승을 비롯한 반려동물은 출생의 눈물이 없다. “인생은 고통과 고난의 연속이다”라는 외침의 눈물인가. 신학과 철학사에서 고통과 악의 문제에 답변하려는 연구를 신정론(theodicy)이라 한다. 라이프니츠(W. Leibniz)가 θεζο(theo, 神)와 δικη(dike,義)로 처음 사용하면서, 신정론이란 주제가 부각되었다. 신학에서 인간의 고통은 악을 논외 시킬 수 없다. 그러나 종교철학에는 꼭 악의 문제가 대두되지 않는다. 왜 나는 고통을 받고 있는가? 유신론과 무신론의 신정론 접근 방법과 내용은 다르다. 죄와 악은 어디서부터 생겼는가? 전능하신 하나님은 죄와 악에 대한 책임은 없는가? 아우구스티누스 이래로 지금까지 신정론의 문제는 인간의 고통, 죄, 악, 하나님의 전능성이란 주제로 상호 연관되며 매우 치열하게 논증되어 왔다. 신정론에 대한 신학과 철학적 연구는 논증이며, 지적 이해로 확대되지만, 그렇다고 내가 겪는 고통을 해결할 수는 없다. 고통은 이론의 문제 이전에 한 개인의 아픔이기 때문이다. 불의의 사고로, 치명적인 질병의 고통 앞에 신정론의 논증은 위로가 아니라 뺨 맞을 일이다. 욥의 고난은 세 명의 친구들과의 신정론의 논쟁으로 본론 전체를 할애한다. 하나님의 전지전능 앞에 욥은 자신의 고통도, 존재 자체도 아무것도 아님을 깨닫고 회개한다. 고통은 해석이 아니라 이해와 수용임을 그리고 전능자 앞에 인간은 먼지요 풀이며, 안개임을 깨닫는다.

나는 해마다 사순절 고난주간이 되면, 바흐의 마태수난곡(Matthew Passion)과 B단조 미사곡(Mass in B Minor)을 듣는다. 마태수난곡은 마태복음 26장과 27장의 예수님의 고난을 중심으로 78곡, 3시간에 이른다. 바흐는 루터가 종교개혁을 시작한 성 게오르그 교회에서 유아세례를 받았다. 라이프치히에서 서거할 때까지 칸타타 250여 곡과 후대에 음악악보의 백과사전이라 할 수 있는 평균율과 푸가의 기법 등 수많은 기악곡을 작곡했다. 평생 독일을 떠나 본 적이 없는, 아니 교회를 떠나 본 적이 없는 고된 칸토르(Der Kantor, 음악감독) 직책은 음악노동자에 불과했다. 바흐는 이탈리아 교회 소나타 양식인 느림-빠름-느림-빠름으로 6곡을 작곡했다. 1번 1악장, 5번 1악장은 첫 악장부터 느린 선율로 바이올린의 긴 프레이징은 누가 들어도 눈물을 자아낸다. 안나 막달레나와 재혼 후 열세 명의 아이를 낳고, 라이프치히교회에서 서거할 때까지 바흐는 단 한 번도 교회를 떠난 적이 없다. 교회가 집이요 교회가 일터였다. 지역 영주와 마찰, 음악작곡, 교회합창교육, 음악교사 등, 고된 음악노동자의 일생은 마지막 질병으로 서거할 때까지 오직 하나님과 자신만의 싸움이었다. 종교개혁이 시작된 교회에서 3대째 개신교 신앙을 잇는 신앙의 기초 위에 바흐의 모든 음악은 창작되었다. 바흐의 음악양식은 후에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으로 이어지는 고전파 양식의 모태가 되었다. 바흐가 없었다면 고전파, 낭만주의 양식도 존재할 수 없다. 베토벤은 말했다. 바흐(Bach, 시내)는 “시냇가가 아니라 음악의 바다이다.” 고통 없는 인생이 없다. 상처와 눈물 없는 인류 역사는 없다. 고통과 시련, 고난은 인문해석의 이해가 아니라 순응이며 승화의 존재론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고난이 크면 클수록 기도와 외침은 더 깊은 울림으로 성화(聖化)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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