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연구] 솔로몬에 관한 불편한 진실

Google+ LinkedIn Katalk +

산이 높으면 골이 깊다는 말이 있다. 솔로몬은 ‘지혜의 왕’이라는 높은 명성을 누렸지만, 그에 못지 않게 실정(失政)의 골도 깊었다. 솔로몬에 관한 불편한 진실을 살펴본다. 첫째, 솔로몬은 자기 자신이 속한 유다 지파(시므온 지파 포함)에 대해서 지나치게 편파적인 우대 정책을 썼다. 이는 나머지 10지파들의 불평과 불만의 요인이 되었다. 이에 관해서는 지난 회에 언급했다.
둘째, 솔로몬은 많은 건축 공사를 했고, 백성들을 강제 노역에 동원했다. 이는 백성들에게 큰 부담이 되었고 백성들의 불만을 가중시켰다. 셋째, 솔로몬은 지나친 사치로 이스라엘 평등 사회의 이상과 전통을 파괴시켰다. 신앙공동체로서 이스라엘의 사회적 이상 중의 하나는 빈부의 격차가 심화되거나 사회 계층이 고착화되는 것을 막고, 사회적 경제적 평등 사회를 이루려는 것이었다. 그런 면에서 사사 시대는 고대 사회로서는 상당히 평등 사회였다. 기브아에 있던 사울 왕의 왕궁은 좋은 예다. 사사 시대를 마감하고 첫 번째 왕이 된 사울은 그의 고향인 기브아를 수도로 삼고, 그곳에 왕궁을 건축했다. 1920~30년대, 성지고고학의 태두 윌리엄 올브라이트(Albright)는 기브아를 발굴했고, 왕궁터를 발굴하는데 성공했다. 왕궁의 크기는 52m x 35m가 되고, 2층 구조로 되어 있었다. 이를 2중 성벽으로 둘러싼 일종의 ‘요새 궁전’이었다. 궁전터에서는 청동으로 만든 화살촉을 비롯해서 토기로 만든 많은 집기들이 발굴되었다. 그런데 왕궁 궁내에서 발굴되는 토기들은 그 모양이나 장식에 있어서 왕궁 밖의 일반인들이 살던 주거층에서 발굴되는 토기들과 아무런 차이가 없었다. 귀금속으로 만든 집기나 장신구들은 일체 없었다. 이러한 사실은 사울 왕 시대는 사사 시대의 평등 사회의 이상과 전통이 이어져 내려와, 왕이라고 해서 사치를 누린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다윗 왕의 왕실도 사치와는 거리가 멀었다. 다윗은 나단 선지자의 반대로 성전을 짓지 못했다. (삼하 7장) 따라서 왕궁다운 궁전도 짓지 못했다. 고대 사회에서 신전과 왕궁은 같은 구역에 건축되어 밀접하게 연계되었다.(히브리어로 성전과 궁전은 같은 단어이다.) 성전을 지을 수 없는 상황에서, 정치적으로 지혜로웠던 다윗 왕은 화려한 왕궁을 건축할 수 없었다. 사사 시대의 평등 사회의 전통이 다윗 왕 때까지는 어느 정도 유지되어 내려왔다.
솔로몬 시대에 와서 상황은 완전히 달라지게 되었다. ‘솔로몬의 영화와 영광’이라는 말대로, 솔로몬 궁전의 사치는 극에 달했다. 그가 앉는 보좌는 상아로 만들고 (상아는 당시 최고의 고가품이었다.) 그 위에 정금을 씌웠다. 글자 그대로 황금 보좌였다. 또한 궁전에서는 정금으로 만든 집기만 사용했다. 금을 씌워 만든 금방패 500개를 만들어 왕궁을 장식하기도 했다. (왕상 10:17-21) 또한 솔로몬은 후궁이 칠백에 첩이 삼백 명이 있었다고 한다. 믿기 어려운 사실이다. 오늘날 구약학자들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평등 사회의 이념과 전통이 깨지고 빈부의 격차가 심화되고, 경직된 사회 계급이 형성된 것은 솔로몬 왕 때부터라고 생각한다.
넷째, 솔로몬의 부와 권세가 커지고 국제적 위상까지 높아지자,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 그에게 벌어졌다. 지혜의 왕이 우상숭배자로 전락한 것이다.

박준서 교수
<피터스목사기념사업회 회장>

공유하기

Comments are clos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