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 주일 기획탐방 특집] 맹인 최초의 조직교회 한국맹인교회 그 기적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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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하는 것이 가장 큰 위로입니다”

▐ 49년 전 맹인 최초의 조직교회 설립

서울 중심에, 봄이 되면 걷고 싶은 길이 있다. 남산 둘레길이다. 남산 케이블카 건물에서 조금 올라가면 북쪽 둘레길이 시작되는 입구가 나온다. 여기서부터 서울 4대문 안, 마천루 빌딩이 조망된다. 조금 더 멀리 청와대도 한눈에 들어온다. 벚꽃 눈이 내리는 둘레길은 원래 시각장애인들이 서울시에 요청하여 닦아진 길이다. 남산 케이블카 건물 바로 밑에 녹이 발한 검푸른 색의 십자가 탑이 보인다. 49년 전에 세워진 한국맹인교회(이하 한맹교회)다. 남한 최초의 조직교회가 새문안교회라면, 맹인 최초의 조직교회는 한국맹인교회다. 교회 이름에서 한국을 떼놓으면 ‘맹인’이다. 이 교회는 맹인들이 모인 교회이다. 시각장애인을 맹인으로 호칭하는 것은 일제 강점기 때 일본인에 의한 명(名)이다. 그러나 오랫동안 사용한 소경, 봉사는 옛 시대의 신분 차별적으로 부르던 것이기에 현재는 사용하지 않는다. 시각장애인들이 맹인이라는 호칭에는 부담감이 없다. 그래서 성경에도 ‘소경’이 아니라 ‘맹인’으로 개정되었다.

 

▐ 시각장애인 김선태 목사가 기적의 씨를 심다

한맹교회는 1972년 12월, 충무교회(서울노회 중부시찰) 고등부실에서 시작되었다. 그 후 한맹교회의 현 예배당은 의료법인 실로암안과병원 원장인 김선태 목사가 한경직 목사님께 요청하여 영락교회의 지원으로 남산자락 높은 위치에 세워졌다. 시각장애인 김선태 목사로 인하여 맹인교회의 기적은 시작되었다. 여름에는 뙤약볕과 더위에, 겨울에는 매서운 찬바람과 맹추위를 겪어야 했지만 교우들은 멀리 경기 광명, 안양, 인천, 의정부, 쌍문동, 신내동 등 서울 끝 지역에서부터 가깝게는 교회 주변 회현동, 약수동 등 교회가 있는 서울의 중구라는 중앙으로 모여들었다. 코로나19가 시작되기 전까지 전체 교인의 90% 가까이 되는 130명에서 140여 명의 시각장애인 교우들이 매 주일 예배에 참석한 열정이 있는 교회이다. 그렇지만 시작장애 교우들은 영상예배와는 거리가 멀다. 볼 수 없으니 말이다. 오직 현장예배로 듣는 예배이다. 예배 실황을 녹음하여 카톡이나 예배 내용을 문자화하여 메시지로 보내면 핸드폰 메시지에서 읽어주는 방법으로 설교를 전하고 있다. 일반 교회와 달리 한맹교회는 코로나로 인한 비대면 상황에서는 실시간 방송예배를 드릴 수 없기 때문에 좌석에 몇 %라는 거리두기 조치에 매우 민감할 수밖에 없겠다. 좌석의 10%, 좌석의 20%에 따라 두 번이고 세 번이고 대면예배를 드릴 수밖에 없다. 코로나19가 계속되는 상황에서 권호섭 담임목사를 만나 교우들의 신앙생활과 교회 현황, 그리고 시각장애인 교회 목회에 대한 소회를 들어보았다.

▐ 코로나 상황에서 주일예배 상황과 교회운영

한맹교회 예배당 좌석은 2백석 정도이다. 거리두기 단계로 10%면 20명, 20%면 40명이다. 시각장애인들은 비주얼(visual)이 되지 않는다. 오직 오디오(audible)만 가능하다. 듣고(listening), 접촉(touching)만으로 인식기능이 발한다. 맹인교회에 비대면이란 말은 신앙적으로 매우 예민하다. 가정이나 일터에서 영상예배는 장소만 달리하는 같은 시간대의 예배이다. 그러나 시작장애 교우들에게 영상예배는 무의미하므로 오직 예배당 안에서의 예배만 의미가 있다. 물론 예배 실황을 녹음하여 가정에서 드린다 하여도, 스마트 기계의 한계 상 시각장애인들에게는 유익한 도구가 되지 못한다. 주일예배에 대한 목마름이 크다. 권 목사는 코로나 거리두기 조치에 따른 제한적 요소가 어떠하든지, 비대면만 아니면, 예배의 횟수는 관계없다고 한다. 성도들이 예배드릴 수만 있으면 되기 때문이다. 성도들의 예배 참여의식이 매우 강하다고 한다. 코로나19가 막 시작되었던 작년 2월에는 찬양대원들이 찬양하지 못하게 되자 대원들은 7대 방역수칙을 잘 지키면 되지 찬양대 없는 예배는 있을 수 없다 하며, 담임목사를 매우 힘들게 했다고 한다. 권 목사는 처음 겪는 코로나 상황에 찬양대원들을 설득하느라 매우 힘들었지만 성도들의 예배의식과 대원들의 소명감에 감사했다고 흐뭇해했다. 동료 목사들은 코로나로 인한 성도 수 감소와 재정을 걱정하지만, 권 목사는 속내 마음이 기쁘단다. 한맹교회 교우들은 어떻게 하면 코로나 여건 속에서도 교회 예배를 잘 드릴 수 있을까에 집중한다고 말한다.

 

▐ 시각장애인들의 생활 등 현 주소

전국에 여러 맹학교가 있다. 서울맹학교, 대전맹학교, 부산맹학교 등이다. 서울의 ‘국립서울맹학교’는 1912년 조선총독부가 ‘우좌미 카츠오’ 내무국장을 초대 제생원 원장에 임명하면서 제생원 맹아부로 시작하였다. 서울맹학교는 국내 최초의 맹학교이자 처음부터 재활을 목적으로 시작했다. 일제 강점기 때 일본 의사들이 침술요법과 안마술을 맹학교에 전수하여, 1914년에 국가에서 안마, 침술, 구술 면허를 수여했다. 1937년 헬렌 켈러 여사의 방문은 서울맹학교가 국내외에 알려지는 큰 계기가 되었다. 한맹교회는 서울맹학교와 여러 맹학교 출신들이 주류를 이룬다. 맹학교에서는 일반 중고 교과목뿐만 아니라 안마, 침술요법의 과목을 필수 이수해야 한다. 시각장애인들이 사회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안마 침술이 주요 직업이기 때문이다. 혹자는 시각장애인이 어떻게 그 정밀한 기술을 요하는 침술을 할 수 있냐고 한다. 시각장애인들의 촉각과 청각은 대단하다. 이들의 침술은 골절이나 암과 같은 개복하여 수술할 정도가 아니라면 거의 모든 치료가 가능하다. 어느 장로는 주위 분들이 ‘저 분은 거의 신의 경지다’라고 평할 정도로 치료 실력이 뛰어나다고 권 목사는 말한다.

 

▐ 교우들은 영혼을, 목자는 육신의 강건함을

권 목사는 5년 전 부임할 때, 맹인이 침을 놓고, 안마로 병을 고친다는 것을 거의 인정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러나 권 목사 자신의 몸을 진단하고 자신의 몸에 침을 놓은 후 몸 상태가 달라지는 느낌에 놀랐다고 한다. 권 목사는 30년 전에 큰 수술로 많은 고생을 한 후에 그 후유증으로 지금까지 늘 몸 상태가 좋지 않았으나, 자신의 몸을 진단하고는 앞으로 무엇을 먹고 무엇을 먹지 말아야 하는지 음식까지 정확히 구별하고 그 이유를 설명하는 교인 때문에 지금은 10년 전보다 더 건강하다고 말한다. 예전에는 시각장애인들이 이 침술과 안마술로 생활이 괜찮았는데 근래에는 각종 스포츠 마사지, 아시아 지역 마사지, 안마 등 기존의 맹인들만 할 수 있었던 치료업소들이 많이 생겨 경제적인 어려움이 크다고 한다. 여기에 현대 의학의 발달과 맹인에게 안마와 침술 받기를 거리끼는 젊은 세대와, 국가 공인 한의원이 있어 더욱 어려운 상황이 이어졌고 예상치 못했던 코로나19는 더욱 시각장애인들의 생존을 어렵게 한다고 전했다. 이어 의료보험 적용이 되지 않은 시각장애인 안마와 침술은 갈수록 일반인의 주목을 받지 못하는 현실에서 시각장애인들 치료의 의료보험 적용이 꼭 필요하며, 일하지 못하는 맹인들의 후생복지가 제대로 갖춰지길 바란다고 전했다.

 

▐ 시각장애인들의 주 수입원

시각장애인들의 생계를 위한 직업군이 맹학교에서 배운 안마, 침술뿐인지 묻자, 권 목사는 현재는 그렇다고 한다. 유치원, 초등학교부터 지역에 한 명의 시각장애인이 입학한다면, 그 한 명이 똑같이 교과 과정을 마칠 수 있는 교과 점자시스템과 학교 생활에 불편하지 않도록 모든 제반 여건이 갖춰져야 한다. 이것은 상급학교에도 적용된다. 수많은 직업 중 ‘말로 하는 서비스’ ‘안마서비스’ ‘침술’ 외 시각장애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 유치원부터 시작하는 학업 과정과 사회에서의 직장을 선택하는 교육과 직업 선택에서 시각장애인들은 동등 조건에서 출발할 수 없다. 인생에 출발선이 동등하지 않다는 말이다. 이런 상황에서 오직 시각장애인만이 할 수 있고, 또 시각장애인들 차원에서 일할 수 있는 직업군의 마련이 정부대책으로 필요하다. 사회복지는 현장이고, 삶의 현실에서 출발해야 함은 기본이다. 우리는 출생 순간부터 누구도 예외 없이 누군가의 도움의 손을 통해 살아왔다. 모태에서 나를 받고, 나를 씻겨 주고, 먹여 주고, 안아 준 그 손길로부터 지금까지 살아왔다. 그러기에 나도 누군가를 받아주고, 제공해 주고, 안아 주어야 한다고 권 목사는 말한다. 시각장애인들이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해서가 아니라, 우리 모두는 누군가의 손길을 받아 살아왔기 때문이라고 한다.

 

▐ 권호섭 목사의 목회 소망

현재 예배당은 권 목사가 5년 전 부임하여 예배당 전체 건물을 수리하고, 교회 앞 부속건물이었던 교육관을 헐고 새로 선교관으로 개축했다. 12년 전 교회의 노화된 부분과 예배당 누수가 심하여 재건축 계획을 세웠다. 실로암안과병원 원장 김선태 목사와 본 교단 증경총회장 유의웅 목사가 한맹교회 재건축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명성교회로부터 지원을 받아 공사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맹인들이 주축이 된 건축 상황은 순조롭지 못하여 오랫동안 지연되었다. 권호섭 목사는 부임과 동시에 명성교회로부터 지원을 받아 교회 보수와 하자 공사부터 시작하여, 교회 앞 선교관을 새로 건축하여 3년 만에 현재 예배당 건물과 선교관을 완공하였다. 이 과정에서 영락교회로부터 두 번에 걸쳐 지원을 받았으며, 서울노회는 큰 관심을 가지고 후원하였다. 올해는 교회 설립 후 처음으로 시찰회도 개최하며 교우들이 큰 보람을 느끼기도 했다. 공사 과정에서 당회원과 교인들의 헌신적인 기도와 신뢰가 없었으면 지금의 결과는 기대할 수 없었기에 권 목사는 감사하고 또 감사하다고 한다. 권 목사는 “우리 한맹교회 교인들은 시각장애로 인해 직업과 사회활동 영역에 제한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교회 공동체 안에서 감사하고 평안을 누리고 서로 간 연대감의 충만함은 제한이 없다”고 한다. “목사님이 늘 교회에 계신 것만으로도 우리는 든든하고 좋습니다”라고 감사해 한다고 한다. 왜냐하면 선교관 3층이 사택이요, 담임목사 목양실 겸, 숙소가 예배당 옥탑방이기에 권 목사는 24시간 교회를 떠날 수 없는 생활이 곧 목회라고 했다. 권 목사는 “저는 사찰목사요, 관리목사며, 청소하고 심부름하는 머슴 목사입니다”라고 스스로 말한다. 그래서 교회와 교인들과 항상 함께 하는 것이 한맹교회 교인들에게는 위로요, 평안이라고 한다.

 

▐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롬 12:15)

바울의 권면은 처음교회의 아름다운 하나 됨의 표상이라고 했다. 권호섭 목사가 직접 내려주신 커피를 음미하면서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육신은 힘든 목양이지만 얼굴에는 행복감이 넘치는 미소를 보았다. 도움을 받는 교회에서 도와주는 교회, 비장애인들이 감동받는 교회, 보이지 않은 자나 보이는 자나 함께 신앙 생활하는데 아무 불편함이나 전혀 어색하지 않는 그냥 함께 살아가는 그런 목회, 주님이 원하시는 가장 이상적인 교회, 순한 양을 물가로 인도하는 목양자를 보았다.

/구성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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