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이슈] 달란트대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사람들 (282) 고찬익 장로 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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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색에 빠져 재산을 잃고 어떤 사건으로 도피중인 평북 박천 태생 차을경(車乙慶)을 전도했는데 그 후 참 신앙인이 된 차을경은 수다한 교회를 세우고 평양신학교에 입학했다. 이렇게 열정적이며 사랑에 넘친 헌신의 결과 교인 수가 급격히 증가해 1907년 초 5백 명의 교인이 동년 9월에 이르러 1천2백 명이 되었다.
1907년 이른 봄, 고찬익 장로는 청년 김종상에게 불호령을 내렸다. 김 종상의 가문은 전통적으로 우상을 섬기는 집안이었다. “이 사람, 자네 예수를 헛 믿네 그려. 예수님께서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마 10:34-39)고 하신 말씀을 어떻게 읽었나? 믿지 않는 가정에 믿는 자가 있는데 그 가정이 평화롭게 지냈다면 믿음의 표가 아니니라.”

이 말을 듣고 그 성경구절을 다시 탐독한 후 크게 깨달은 김종상은 기회를 살피다가 동년 초겨울 집에 있는 우상 뭉치를 아궁이에 넣어 태워 버렸다. 마침내 아들의 믿음에 탄복한 아버지(김 찬배)는 신주(神主)를 동묘(東廟)로 옮기고 그 방을 기도실로 만들었으며 김종상의 뒤를 따라 그의 조모, 부모, 아내와 두 누이까지 무리를 지어 교회에 나왔다.
고찬익 장로는 1907년의 평양 대 부흥운동 때 큰 역할을 하면서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여 공부하던 중 1908년 4월 14일 누이동생의 집에서 소천하였다. 그의 부보(訃報)가 알려지자 전국적으로 애도했다. 그의 유해는 서울 교회들의 간청에 의해서 평양에서 발인하여 서울로 운구되었는데 역전마다 애도의 물결이 넘쳤다. 남대문역에 도착했을 때 인산인해를 이룬 애도 자들이 울음바다를 이루었다. 이것은 그가 조선교회에 끼친 감화를 말해주는 것이었다.
시신은 연동교회에 운구되어 전체 교인이 애도하는 슬픔 속에서 장례식을 거행했다. 그가 “주의 사역에 온갖 정성과 충성을 다했으므로 신자가 날로 늘어 불과 수년 동안에 천 수백 명의 교인이 몰려들었을 뿐만 아니라 교인 모두 그를 태산같이 믿고 따르다가 졸지에 상면을 당해 어른들은 두 손을 잃은 듯, 아이들은 부모를 여읜 듯 슬픔 가운데 장례식을 마쳤는데 이 소식을 들은 불신자까지도 애석해 하였다”는 내용의 기록을(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 p.189)에 남겼다. 게일 목사는 고찬익 장로가 세상 떠난 후 며칠 동안 식음을 폐하고 울었다고 한다.

1909년 게일 목사는 그의 저서 에서 고찬익에 대해 “이 사람이야 말로 노벨상을 받아도 좋은 사람이다”라고 하였다. 게일 목사는 고찬익 장로가 죽은 후 그가 신학교를 졸업한 후 동 교회 봉사 목사로 게일 목사와 같이 목회하려고 했다고 <선교 보고>에 기록했다.
고찬익 장로는 가난한 자, 힘없는 자를 특별히 돌보아 주었다. 그리고 신발을 만들면서도 성경을 펴 놓고 읽고 또 읽었다. 이렇게 해서 신약성경을 모두 섭렵했다. 그는 기억력이 비범해 선교사가 신약성경의 구절을 찾는데 안내인이 되기도 했다.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는 말씀은 어디에 있소?” 고 장로는 “마가복음 9:23에 있습니다.” 선교사가 “내가 땅에서 들리면 그 때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는 어디에 있소?” 고찬익이 “요한복음 12:32입니다.”

이승하 목사<해방교회 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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