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 믿음으로 한국 땅에 뛰어든 배위량 목사 (85)

Google+ LinkedIn Katalk +

배위량의 제 2차 순회 전도 여행 (64)

구미에서 상주까지 (12)

배위량은 1983년 4월 25일 밤 구미시 해평에서 잠을 잔 후에 도개면을 거쳐 의성군 단밀면(丹密面)을 거쳐 단밀면과 낙동강을 경계로 하여 낙동강의 서쪽 편인 상주시 낙동면으로 갔다. 의성군은 1읍 17면으로 이루어진 전형적인 농촌지역이다. 의성군청 홈페이지에 단밀면에 대한 안내를 아래와 같이 하고 있다.

단밀면은 의성군 서부에 위치하여 낙동강과 안계평야를 끼고 있습니다. 만경산의 아름다움과 맑고 깨끗한 자연환경, 그리고 지방도를 따라 효자각, 효부각, 열녀각이 11개소가 있는 효와 충의 고장입니다. 우리지역에 생산되는 주요 농산물은 맛좋고 영양 많은 쌀과 보리쌀, 참외, 복수박, 가지 등이 있습니다. 관수루에서 보이는 낙동강의 절경과 낙단보 야경은 관광과 휴식처로써 각광을 받고 있습니다.

의성군 서남쪽에 자리잡고 있는 단밀면은 낙동강을 경계로 서북쪽에 위치한 상주시와 접하고 있고 낙동강의 지류인 위천(渭川)이 면의 동북면의 경계를 이루고 있다. 단밀면은 법정리 8개리(행정리 18개리)로 이루어져 있고 인구는 1,754명으로 982세대(농가 676세대 + 비농가 306세대)가 면내에 거주한다. 단밀면은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에 따라 단밀현에 속해 있는 단서면(丹西面), 단남면(丹南面)과 단동면(丹東面) 일부를 병합 의성군 단밀면으로 개칭”되었다. 낙동강을 경계로 하여 서쪽으로 경상북도 상주시 낙동면과 접하고 단밀면의 서남쪽은 구미시 도개면으로 이어지며 북쪽에는 의성군 단북면과 상주시 중동면과 접해 있다. 남쪽에 만경산(499m)과 장자봉(421m)이 솟아 있고 대부분의 지역이 100~300m의 구릉성 산지를 이루며, 위천 유역을 따라 소규모의 평야가 발달하고 있는 단밀면의 자연환경은 아래와 같다.

동부의 위천(渭川) 유역에 비교적 넓은 평야 지대가 단북면을 경계로 펼쳐져 있다. 서쪽으로 낙동강이 흘러 상주시 낙동면과 경계를 이루고, 면의 중앙부에서 낙동강의 지류가 동서로 흘러 그 유역에 좁은 평지를 이루고 있다. 면의 한가운데는 만경산이 우뚝 솟아 위천과 낙동강이 서북쪽을 둘러싸고 있다. 단밀면은 낙동강을 경계로 옛 선산군과 인접한 지역이다. 낙동강의 본류와 그 지류인 위천(渭川)이 면의 동·서·북쪽 경계를 이루며 흐른다. 그 주변의 평야 지대와 그 바깥에 발달한 구릉성 산지에 옛날부터 취락이 발달하였다. 속암리(涑巖里)·용곡리(龍谷里)·위중리(渭中里)·주선리(注仙里)·서제리(書堤里)·팔등리(八嶝里)·생송리(生松里)·낙정리(洛井里) 등 8개 법정리와 18개의 행정리로 구성되어 있다.

단밀면의 역사와 유래에 대해서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은 아래와 같이 소개한다.

단밀면이 위치한 곳은 삼한 시대에는 진한(辰韓)에 속한 지역으로 난미리미동국(難彌離彌凍國)의 도읍지였다. 통일 신라 때 현(縣)으로 개편되어 무동미지현(武冬彌知縣) 또는 무동미지현(武冬米知縣)이라 하였다가 757년(경덕왕 16년) 12월에 행정 구역 개편 때, 단밀현(單密縣)이라 개칭하여 문소군(聞韶郡)의 영현(領縣)으로 하였다. 고려에 와서도 그대로 내려오다가 1018년(현종 9년)에 이웃 안정현·비실현과 함께 상주목의 속현이 되었다. 단밀현(丹密縣)으로 명칭을 바꾼 것은 고려 말이나 조선 초로 보인다.

낙동강과 낙동강의 지류인 위천이 흐르는 단밀면은 수리 시설이 잘 갖춰져 농업이 발달된 지역이다. 위천은 경상북도 내륙의 젖줄이 되어 흐르고 이 하천 유역에 많은 취락과 농경지가 발달되어 있다. “낙동강이 흐르는 낙정 지역은 옛 나루터로 관수루와 함께 휴양 단지가 조성되고 있어서 많은 관광객이 찾고 있는 곳이다. 교육 기관으로는 초등학교 1개교, 중학교 1개교가 있다.” 단밀면 생송리에 있는 만경산에 성터가 남아 있고 “유서 깊은 낙정 나루의 옛 터를 끼고 강변 절경이 펼쳐져 있다. 주선리 산 4번지에는 지석묘 2기(난미리미동국 왕의 묘로 추측)가 있는데, 그 규모가 크기로 유명하다.”
위천은 110.7㎞나 되는 낙동강 지류의 하천으로 “경상북도 군위군 고로면과 의성군 춘산면, 청송군 현서면의 경계인 매봉에서 발원하여 군위군 중심부를 북서류하여 의성군을 지나 낙동강으로 흘러드는 하천”으로 “매봉 남사면의 여러 골짜기에 물이 모여 서남쪽으로 흘러 고로면의 중심부를 뚫고 화수리에 이르러 북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의흥면 중심부를 북서류한다.” 흘러가면서 넓은 평야를 이루게 하는 위천은 “상주시 중동면 우물리에서 낙동강으로 흘러들어 간다.”
의성군 단밀면 속암리(涑岩里)에 있는 속수서원(涑水書院)은 “1509년(중종 4)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신우(申祐)·손중돈(孫仲暾)·김우굉(金宇宏)·조정(趙靖)·조익(趙翊)을 추모하기 위해” 세워진 서원이다. 이 서원은 “지방교육의 중심지로 이용”되었고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1820~1898)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철거하였다가 1972년 복원하였다.”
낙단보는 의성군 단밀면과 상주시 낙동면을 잇는 보이다. 낙단보 근처에 가면 “낙동강에 얽힌 해설과 함께 낙단보 등 자연 풍광을 배경으로 11km에 달하는 구간을 운행”하는 율정호를 탈 수 있다. 낙동강과 위천이 만나는 두물머리에서 조선 세종 시절에 조선 최초로 통신사(朝鮮通信使) 신분으로 일본을 방문한 율정 박서생(朴瑞生)이 일본으로 향했다고 전해지는 뱃길을 따라 운행하는 율정호를 탈 수 있다. 율정호를 타고 낙동강을 둘러보며 지나온 역사의 흔적을 되돌아 볼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다. 이렇게 낙동강을 둘러보는 것도 배위량 순례 길의 묘미가 될 것이다. 1428년(세종 10) 통신사로 일본에 다녀온 박서생은 조선 수차(水車)의 이점과 그 도입을 건의해 농사기술의 혁신을 가져온 인물이기도 하다. 단밀면과 접하고 있는 의성군 비안면 용천리에 1898(고종 35)년 건립된 ‘박서생 사적비’가 있는데 “비문에는 박서생의 학풍, 야은 길재와의 관계 등 박서생의 일생이 기록되어 있는데 마모가 심한 편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박서생에 대하여 아래와 같이 소개한다.

1401년(태종 1) 증광시에 병과로 급제하고, 1407년(태종 7) 중시에 을과로 급제하여 우정언에 제수되었다. 박서생은 이후 응교 · 집의 등 주로 언관직에 종사하였다. 특히 1420년(세종 2) 집의로 재직할 당시 상왕인 태종의 행차를 막고자 언론을 펼쳤다가 상주로 유배당하기도 하였다. 이후 공조참의 · 병조참의 · 집현전 직제학 등을 역임하였다. 특히, 박서생은 1428년(세종 10) 통신사로 일본에 다녀왔는데, 이때 수차(水車)의 이점과 그 도입을 건의해 농사기술의 혁신을 가져왔다. 아울러 그가 보고한 일본의 정세와 왜적의 동태는 이후 조선이 일본에 대한 정책을 변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배재욱 교수
<영남신학대학교>

공유하기

Comments are clos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