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연구] 솔로몬 국제화 시대의 명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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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로몬은 성공적인 왕이었다. 선왕 다윗도 하지 못했던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했고, 마병대와 병거대로 군비를 강화해서 주변 나라들을 제압하는 강한 나라로 만들었다. 그가 이룩한 여러 가지 업적 중에 빼어놓을 수 없는 것이 ‘국제화’였다. 그래서 구약학자들은 솔로몬 시대를 ‘이스라엘의 국제화 시대’라고 부르기도 한다. 역사를 소급해 보면 사사 시대 2백 년간은 이스라엘이 주변 나라들 틈에 끼어 생존에 급급하던 시대였다. 첫 번째 왕 사울은 블레셋과 전투에서 전사했고, 그의 뒤를 이은 다윗 왕은 압살롬의 반란과 세바의 반란을 극복하고 다윗 왕조의 기초를 확고히 하느라고 온 힘을 소진했다.

솔로몬은 다윗 왕이 단단히 다져놓은 왕정의 기반 위에 왕위에 오른 행운아였다. 그는 척박한 땅의 이스라엘이 부강해지는 길은 국제 해상 무역이라고 생각하고, 국제 무대로 시야를 넓혔다. 이스라엘이 해상 교역을 할 수 있는 무대는 두 곳이었다. 지중해와 홍해였다. 그런데 지중해 쪽은 레바논(=페니키아)이 이미 해상권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경쟁할 수 없었다. 그는 홍해 쪽으로 눈을 돌렸다. 먼저, 이스라엘의 최남단 에시온 게벨(오늘날 엘랏)에 홍해로 진출하는 항구를 건설했다. 레바논의 기술 지원을 받아 배를 만들고 항해술도 배웠다. 그리고 경쟁자가 없는 홍해로 진출하여 해상 교역을 시작했다. 솔로몬의 예상은 적중했고, 국제 교역은 솔로몬 왕실에 엄청난 부를 가져다 주었다. (왕상 9:25-28, 10:22)
솔로몬의 부와 권세가 늘어나면서, 그의 국제적 위상도 날로 높아졌다. 솔로몬은 주변의 나라들과 긴밀한 유대를 맺고 빈번한 왕실 교류도 이루었다. 시바의 여왕이 직접 솔로몬을 찾아오는 친선 방문도 있었다. 고대 국가 간의 친선 관계의 징표는 왕실 결혼이었다. 솔로몬은 애굽의 공주와도 결혼했다. 이는 솔로몬의 격상된 위상을 말해준다. 솔로몬은 애굽 공주뿐만 아니라, 모압, 암몬, 에돔, 시돈 등 여러 나라 왕실과 결혼 관계를 맺었다. 솔로몬의 외교적 업적이었다.
그러나 모든 일에는 명암의 양면이 있는 법이다. 솔로몬의 외교적 성과는 그로 하여금 우상숭배자로 만드는 무서운 덫이 되었다. 솔로몬과 왕실 결혼한 이방 여인들은 그들이 자기 나라에서 섬기던 신들을 그대로 섬겼고, 결국 솔로몬 왕을 이방 신들을 섬기는 우상숭배자로 전락시켰다. 열왕기상 11장은 우상숭배자로 타락한 솔로몬의 모습을 상세히 기록해 놓았다.

“솔로몬 왕이 바로의 딸(=애굽 공주) 외에 이방의 많은 여인을 사랑하였으니(=왕실 결혼을 의미) 곧 모압과 암몬과 에돔과 시돈과 헷 여인이라… 그의 여인들이 그의 마음을 돌이켜 다른 신들을 따르게 하였으므로… 이는 시돈 사람의 여신 ‘아스다롯’을 따르고, 암몬 사람의 가증한 ‘밀곰’을 따름이라. 솔로몬이 여호와의 눈앞에서 악을 행하여… 모압의 가증한 ‘그모스’를 위하여 예루살렘 앞 산(=감람산)에 산당을 지었고, 또 암몬 자손의 가증한 ‘몰록’을 위하여 그와 같이 하였으며…”(왕상 11:1-8) 하나님은 진노하시고 솔로몬을 두 번이나 엄하게 꾸짖으셨으나, 그는 끝내 하나님의 명령조차 듣지 않았다고 열왕기는 기록했다. (11:9-10) 이때 역사의 무대에 두 명의 인물이 등장한다. 에브라임 지파 출신의 여러보암과 선지자 아히야이다.

박준서 교수<피터스목사기념사업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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