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비사] 한국교회학의 기둥 2. 한국의 지정학적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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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언더우드 선교사가 본 한국의 지정학적 위치

지정학이라 함은 지리적 위치가 정치적 의미를 가진다는 말이다. 근대 한국을 복음의 반석 위에 정초시킨 언더우드는 한국의 지정학적 위치를 그의 선교보고서 첫머리에서 주목하고 있다. 그 처음은 이렇게 시작한다. “청일전쟁이 끝날 때까지 한국, 이 은거의 나라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청일전쟁 후부터 한국의 지정학적 위치가 노출되었다는 말이다.

1907년 언더우드는 요양 차 스위스로 건너갔다. 그리고 곧 미국으로 와『한국이 부른다』-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종교적으로-라는 책을 펴냈다. 이것은 일종의 선교 보고서였다. 지금은 한국선교의 황금시기이니, 때가 무르익어 추수와 수확을 기다리고 있으니, 이 한국의 밭으로 추수할 일꾼들을 어서 보내라고 촉구하고 있었다. 언더우드는 이 선교보고서의 첫 장에서 한국의 국토를 서술하는데 그 목표는 이러했다. “한국의 지정학적 위치를 고려할 때 아시아 국가 전체의 복음화를 위해 한국 복음화가 갖는 중요성을 인식하기 위함.”

중국과 일본 사이에 있는 한국, 그 지정학적 위치가 언더우드의 눈에 띄었다. 그리고 그는 스물여섯의 장년으로 한국에 와서 23년간 선교한 후, 한국의 지정학적 위치와 그에 따른 사명을 확신할 수 있었다. “선교역사가 충분히 증명하고 있듯이 한국이라는 나라의 복음화는 머지않아 이루어질 가능성이 있으며, 이것은 중국을 그리스도께 사로잡히도록 하는 사역을 가속화할 것이다.”

2. 이승만이 본 청일전쟁과 한국의 지정학적 위치

한국의 지정학적 위치가 주목된 때가 청일전쟁 이후라는 말은 우리 자유대한민국의 자랑스러운 국부 건국대통령 이승만 역시 언급한 바가 있다. 한성감옥에 있던 1900년에 번역 서술한『청일전쟁』을 1917년 하와이에서 펴내면서 이승만은 그 서문에 이런 말을 남겼다. “조선 역사에서 제일 큰 난리는 임진왜란이요, 한인(韓人)들이 제일 원통하고 분하게 여기는 전쟁도 임진왜란이다. 수천 년 동안 조그마한 섬에 갇혀 살던 일본은 오랫동안 대륙으로 진출하려는 야욕을 키워오다 임진년(1592)에 그 뜻을 한 번 시험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그 후 일본은 300년 동안 다시 준비하여 갑오전쟁”으로 그 뜻을 이루었다. 즉 청일전쟁은 오랫동안 품어왔던 일본의 대륙진출 야욕이 실현된 것이라고 보고 있다.

그런데 이승만이 이 말을 하고 있는 때는 1904년 감옥에서 나와 미국에 특사로 파견되었다가 조지워싱턴대학, 하버드대학, 프린스턴대학에서 각각 학사, 석사, 박사 과정의 공부를 마치고 학위를 취득한 후 7년이 지난 때였다. 그 어간 나라도 잃었고, 이승만은 일본의 105인 날조사건의 마수를 피해 하와이에서 독립운동을 벌이고 있었다. 이때 청일전쟁과 한국의 지정학적 위치 관계가 그의 폭넓은 시야에 새롭게 드러났던 것이다. 그리고 “이 전쟁으로 말미암아 한국은 힘과 세력이 약해져 망하게 되었고, 이 전쟁으로 독립도 잃었다. 따라서 오늘날 한국이 이렇게 된 원인은 갑오전쟁에서 비롯된 것이다.”

류금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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