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돌아 본 삶의 현장] 토종닭과 씨암탉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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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아내를 병원에 두고 학교에 와보니 한(韓) 교장으로부터 편지가 와 있었다. 반가워서 뜯어보니 의외의 소식이었다. 다음 해 대전대학으로 편입하지 않겠느냐는 내용이었다. 자기 조교로 와서 조금 도와주면 첫 학기 등록금과 생활비는 보조해 주겠다는 말이 덧붙어 있었다. 나는 손이 떨리었다. 떠나면서 기도하겠다고 하더니 정말 나를 잊지 않았는가? 나를 위해 두고두고 기도해 왔다는 말인가? 

그분은 내가 유학의 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그래서 영어 교사들의 회화 연습을 일주일에 3번씩 자기 집에서 밤에 할 때도 나를 그곳에 끼워 넣어 주었다. 나는 고마웠다. 그런데 나는 한술 더 떠서 그곳에 다니면서 일기장을 두 권을 만들어 영어로 일기를 쓰고 매주 그것을 교대로 제출해 교정해 받았다. 또 그분은 자기가 개척교회를 하고 있었는데 그 비용은 한국에서 고무신을 사서 미국에 팔고 그 돈을 교회 유지 비용으로 썼다. 그때도 내 도움을 요청했고 또 매주 영문 설교 원고를 주면서 나에게 번역해 달라고 해서 번역해 주면 그것을 연습해서 한국말 설교를 했다. 미국 선교부 고등 교육국에서는 매년 목사나 교수요원을 장학금을 주어 미국에 유학시키고 있었는데 나도 그런 장학금을 받기를 원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나는 자격 미달이었다. 박사과정을 밟으려면 적어도 한국에서 석사는 끝낸 사람이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내게 너무 높은 담이었다. 그런데 그분은 기전학교를 떠나 대전대학으로 가면서 적어도 내가 정규 4년제 대학에 가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한 교장의 배려는 너무나 고마운 것이었다. 그런데 어쩌면 이렇게 셋째 애가 태어난 다음 날 이런 소식을 받을 수가 있는가? 나는 바로 전날 유학을 포기하고 남편과 아버지의 도리를 다하겠다고 결심하지 않았는가? 지금은 안돼. 나는 이제 어린애가 셋이야. 갓난아이까지. 정말 안돼. 대학을 마치겠다면서 왜 이렇게 무계획한 생활을 했을까? 왜 공부와 어린애를 동시에 원하는 그런 의식의 미분화 상태에서 살 수가 있었을까? 우리는 서로 애정이 불타 여건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우리는 어린애를 원했다. 우리가 결함이 없는 부부라는 것을 빨리 확인하고 싶었다. 그러면서 공부를 해야 한다는 생각은 또 따로 별도의 것이었다.

나는 착잡한 생각으로 두 손으로 머리를 싸안았다. 그때 갑자기 지난번 월례 고사를 보고 채점을 하고 있다가 깜박 잠이 들었던 때가 생각났다. 그때 나는 내가 사각모자를 쓰고 있던 꿈을 꾸었다. 4년제 대학을 다니는 학생을 볼 때마다 부러웠던 것이 네모난 학사모였다. 당시는 내가 왜 그런 꿈을 꾼 것인지 영문을 몰랐다. 그런데 한 교장의 편지를 받고 나서 갑자기 이 꿈이 떠오른 것이었다. 왜 이 상황에서 진학 문제가 생각난 것일까?

아내가 퇴원하고 나서도 나는 이 편지는 없었던 일로 하고 말도 꺼내지 않았었다. 그런데 어느 날 아내는 이런 말을 했다. 

“이제는 유학 꿈은 포기했어요?”

“그래야지 뭐. 애 아버지가 무슨 유학이야.”

“그래요. 이제 좋은 작품이나 쓰세요”

나는 위로하듯이 말하는 그녀에게 한(韓) 선생의 편지 이야기를 했다. 아내는 내 얼굴을 쳐다보았다. 금방 심란해진 표정이었다.

“잊어버려. 나 그럴 생각 없어. 서른 살에 세 어린애의 애 아버지로 무슨 대학이야.”

그러나 며칠 뒤 아내는 중대 선언을 했다. 나는 유학의 꿈을 포기하지 않을 텐데 애들을 다 키워 놓고 떠나면 너무 늦을 것이니 공부를 바로 시작하는 것이 좋겠다는 것이었다. 

“우리의 삶은 처음부터 평탄하지 않았잖아요?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이 예비한 기회일지도 몰라요.”라고 아내는 말하였다.

오승재 장로 

•소설가

•한남대학교 명예교수

•오정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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