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산책] 평생의 은인 이도선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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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마다 《스승의 날》이 되면 몇 분의 은사를 떠올리게 되거니와 그 중에서도 이도선(李燾善, 1921~2013) 선생님은 부족하나마 ‘오늘의 나’를 있도록 결정적인 도움을 주신 어른이시다. 그 어른이 생존해 계시다면 금년 만 100세가 되신다.

한국전쟁 중이던 1952년 고향인 경기도 광주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대도시의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학생들을 위해 시골동네에 고등공민학교가 생겨 중학교 과정의 명맥을 이어갈 수 있었다. 그때 우리에게 오셔서 영어와 수학을 가르쳐주신 분이 이도선 선생님이시다. 이 어른은 황해도가 고향이신데 해방직후에 월남하셔서 미군부대에서 통역을 하시며 고학,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에서 교육학을 전공하신 것으로 전해들은 바 있다. 당시 분원감리교회 청년부에서 활동하던 친구 누님 金某(1935~ )권사의 증언에 의하면 이도선 선생님은 당시 우리 모교회의 청년부 회장으로 청년공동체를 이끌어 나가셨다고 한다. 

1955년, 내가 고향에서 중학교과정을 마칠 무렵, 선생님께서는 서울 숭실고등학교로 전근해 가셨는데 교무주임의 직책을 맡으셨다고 했다. 고등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나는 만 2년간 선친의 농사일을 돕다가 어느 날, 땔나무를 한 짐 지고 집에 도착하여 우리 집 사립문 앞에서 李선생님과 마주치게 되었다. “선생님, 어떻게 우리 동네에 오셨어요?” “너, 정일이구나. 너, 고등학교에 진학을 해야지.” “집의 형편이 어려워요.” “그래도 시작하면 마칠 수 있게 되어 있어. 다음 주 월요일에 용산 해방촌 숭실학교로 나를 찾아와.” “네, 감사합니다.”

얼떨결에 선생님 말씀에 용기를 얻어 저녁나절 들일을 마치고 귀가하신 아버지께 李선생님을 만나 뵌 자초지종을 말씀드렸더니 고개를 끄덕이시면서 무슨 결단을 하셨는지 “다음 월요일, 나하고 같이 서울에 가자. 돈암동에 내 이종누님이 계신데 손주 하나 데리고 사시니까 그 곳에서 네가 손주를 가르치는 조건으로 숙식을 도와달라고 떼를 써보마.” 지성이면 감천이라더니 결국 1957년 봄, 숭실고등학교의 입학문제도 해결이 되고 돈암동 친척 댁에 떼(?)를 쓰러 갔던 일도 순조롭게 마무리가 되었다. 

내가 숭실고등학교를 졸업할 즈음, 李선생님께서는 경기도 교육위원회 장학사로 부임해 가셨고 얼마 후에 중등교육과장을 역임하신 후, 일본 후꾸오카[福岡] 재일동포고등학교장의 발령을 받으셨다. 당시 숭실고등학교 교장님은 김취성(金聚成) 선생님으로 이도선 선생님과 황해도 동향(同鄕)으로 나를 만나실 때마다 일본에 계신 선생님의 안부를 묻곤 하셨다.

훗날, 내가 대학에서 영문학을 공부하고 나서 모교 ‘숭실’에 교사로 응모했을 때, 내게 후견인과도 같으셨던 이도선 선생님의 배려가 큰 도움이 되었다. 그 이후, 3개 고등학교에서 10여 년간 교편생활을 하다가 도미해서 공부를 마치고 목원대학 영문과에 부임하던 1986년, 李선생님께서는 수원에 있는 《수원간호전문대학》(현 ‘수원여자대학’의 전신)의 학장직에서 정년퇴임을 하셨는데 경기도청 대강당에서 열렸던 퇴임식에 나도 참석을 했었다.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 매년 스승의 날이 들어 있는 5월이면 옛날 고향에서 중학교과정을 가르쳐 주시던 이도선(李燾善), 민혜림(閔惠林), 임백구(林白龜) 세분 선생님을 대전에 초대해서 연례행사로 사은회(?)를 가지곤 하였다. 점심식사 후에는 대전 현충원, 대전 동물원, 또는 대전 엑스포공원 등, 대전의 명소를 안내해 드리곤 했었다. 내가 목원대학 인문대학장의 직임을 맡고 있던 1993년, 李선생님께서는 학교에 도착하시자마자 “학장실 좀 가보자”하시더니 학장실 책상 위에 놓인 ‘학장명패’를 어루만지며 좋아하시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그 후, 李선생님의 건강이 좋지 않으셔서 마지막 위로연은 선생님이 사시던 수원의 某음식점에서 스승과 제자가 부부동반으로 모였었는데 그해의 회동이 5년간 계속되던 사은 행사의 마지막이 되었다. 

선생님께서는 평생 동안 장로님으로 김장환 목사님이 담임하신 《수원중앙침례교회》를 섬기시면서 신앙생활과 후학양성에 전념하셨으며 교육자로서, 그리고 신앙인으로서 만인의 귀감이 되는 어른이셨다. 지금 생각해 보면 李선생님의 사랑과 배려로 부족하나마 오늘의 내가 있다고 생각하니 “스승님의 은혜가 하해(河海)와 같다”는 말을 절감하게 된다.

문정일 장로

<대전성지교회•목원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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