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실용주의를 경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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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용주의는 계몽주의 못지않게 교회에 해악을 끼치고 있다. 실용주의는 가치가 결과에 의해 결정되는 미국적 철학이다. 실용주의의 뿌리는 세속적인 인본주의다. 진리는 쓸모 있고 삶에 도움이 되는 것으로 개념을 정의한다. 진리가 효과적인가, 아니한가를 따진다. 실용주의는 세상적인 눈가림이나 거짓이 효과적이고 교회의 양적 성장에 도움이 된다면 받아들이고 싶은 유혹에 빠지기 쉽다. 실용주의가 교회에 들어오면 성경적, 전통적인 방법은 설 자리를 잃기 쉽다. 설교는 청중이 듣기 좋아하는 재미를 섞어 예화 중심으로 흘러간다. 대중 심리와 입맛에 하나님의 말씀을 변형시켜 맞추려 한다. 많은 사람들은 교회와 목회자의 성공 여부를 출석 교인 수로 평가하려고 한다. 때문에 사람을 많이 모이게 하는 수단과 방법이 성경적 검증없이 받아들여지기 쉽다. 소위 마케팅 목회다. 교회가 세상과 벗이 되면 하나님과는 원수가 된다. 세상적 방법에 의지하면 성령님은 계실 자리가 없어진다. 실용주의가 힘을 쓰면 성경의 권위가 약화될 것이 뻔하다. 성령의 능력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고 인간의 지성을 의지하게 된다. 복음은 상품이 되어 수요자 중심으로 변질된다. 교회의 본질적인 모습은 약해지고 세상적, 인간중심의 모습으로 변해 간다. 설교는 성경적 강론, 깊이 있는 진리를 설명해 주지 못하고 회중을 자극시키는 얄팍한 언어들로 나타난다. 인기있는 설교를 하고 싶어진다. 회중은 죄와 회개, 구원과 성령의 열매, 천국과 지옥, 심판을 선포하는 설교를 힘들어 하게 된다. 은혜와 축복에 대한 설교를 더 선호하게 된다. 그렇다 보니 교회 문화는 점차로 중대한 것과 사소한 것, 진리와 세속적인 것을 분별하지 못하게 된다. 교회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점차 회중의 취향에 영합하고 만다. 찬양은 대중음악을 답습해 가고 있다. 유행가 리듬처럼 편곡을 하고 노래를 이상하게 꼬아서 부른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죄를 직면하고 바로잡는 설교여야 한다. “시대의 정신과 결혼하는 자는 곧 미망인이 된다”는 말이 있다. 교회 성장을 위해서 세상의 가치관을 포용하고 대중문화를 끌어들이면 결국은 교회는 쇠퇴의 길을 걸었던 것을 역사는 증거한다. 어려울수록 타협하지 말아야 한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하나님 앞에 신실해야 한다. 세속화는 세상의 가치에 맞추는 것이니 죄가 된다. 세속화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추구하는 의식(意識)이다. 설교자의 단정한 복장은 하나님 앞에 도리이다. 회중 앞에도 기본 예의이다. 설교자의 복장은 예복이다. 흰 와이셔츠에 단일색 계통의 정장이 예복이다. 콤비를 입거나 이상한 색깔의 양복이나 와이셔츠는 안 될 일이다. 윗 호주머니에 왜 행커치프를 꽂는가? 연예인 흉내라도 내고 싶은가? 헤어스타일은 세상의 유행을 따라 하고 강단에 오르는 모습은 참으로 보기 민망하다. 유행을 흉내내면서까지 외모에 멋을 부리고 싶은가? 회중에게는 세상을 본받지 말라고 하고..! TV방송 설교를 자주 시청한다. 설교자로서 복장이 단정한 분들이 많이 있다. 구약시대에는 제사장들이 에봇을 입었다. 하나님 앞에서의 예복이다. 사도 바울은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 하노니~” 복음에는 하나님의 능력이 있다. 교회는 성경에 굳건히 서 있어야 한다. 예수님의 가시 면류관을 증거해야 한다. 예수님께서 우리 위해 지고 가신 십자가를 전해야 한다.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고 세상에는 미련한 것으로 보일지라도 십자가만이 교회의 능력이 되어 준다.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 광야 길을 걸을 수 있어야 한다. 교회는 거룩해야 한다. 실용주의 철학과 세속주의가 교회 안에 침투해 들어오는 것을 막아 내는 것이 한국교회가 살고, 하나님 앞에 바로 서는 길이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우리에게 원하신다. 사도는 어떻게 성공할 것인가를 말하지 않는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따를 뿐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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