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돌아 본 삶의 현장] 대전대학 <2>

Google+ LinkedIn Katalk +

대학위원회는 이제는 1954년 6월부터 대학이 세워질 부지를 답사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현재 행정관의 위치는 결정되었다. 거기에 참석한 예수병원 원장이었던 구바울(Paul S. Crane) 원장은 다음과 같이 회상하였다. 

그곳은 남향이었고 앞으로는 과수원을 바라보고 나직이 경사를 이룬 아름다운 푸른 논이 깔린 곳이었다. 낮은 구릉 위에는 작은 토담집이 있었는데, 집 앞 나무에 끈이 뒤엉킨 염소 한 마리가 매여 있었다. 우리는 이곳에 대학의 중심이 될 건물인 행정관을 짓자고 결정하였다. 나무에 매여 있는 염소는 덤불에 뿔이 걸려, 이삭의 생명을 구했던 아브라함 이야기를 생각나게 했다. 이것은 새로운 대학의 출발을 위해 좋은 징조였다.

또한, 대학위원은 대학의 사명 선언을 채택하였다. 그것은 아래와 같다.

 사명 선언(Mission Statement)

한남대학교의 사명은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국가와 인류를 섬길 수 있는 유능한 지도자를 양성하고 기독교 세계관을 바탕으로 방대한 학습 분야에서 새로운 지적 전선을 개척하는 일이다. 성경의 진리, 자유 및 봉사는 모든 가르침과 배움의 핵심이다. 이 핵심이 가르치는 자와 학생들 자신의 인격에 스며들도록 도와야 한다.

한 대학이 세워지면 그 대학이 사회와 세계를 위해 무슨 사명을 가지고 태어났는지 그 정체성이 분명해야 한다. 대전대학은 기독교 세계관을 가지고 국가와 인류를 위해 섬길 수 있는 인재를 양성한다는 뚜렷한 사명을 가지고 우렁찬 울음소리를 내고 세상에 태어난 대학이다. 즉, 대전대학은 흔히 말하는 한국에 세워진 또 하나의 대학이 아니었다. 

대학위원회는 1955년 1월 회의를 거쳐 대전대학 설립허가서를 문교부에 제출하였다. 그러나 문교부는 정규대학 시설 기준에 너무 미달이라고 반려하였다. 그리고 우선 대전 기독학관(基督學館)으로 인가를 받는 게 어떻겠냐는 충고를 받았다. 이에 따라 1956년 학관 인가를 받자 바로 4월 입학식을 거행했는데 그것이 성급한 결정이었다. 학관은 정규대학이 아니었다. 1955년부터 계속 대전대학은 설립 신청을 하고 있었지만, 연기되고 드디어 정규대학이 인가를 받은 건 3년 뒤인 1959년이었다. 그해 입학 연도부터 1학년을 모집하였으므로 기독학관 학생을 2, 3학년으로 받아줄 수가 없었다. 결국, 대학은 실책을 인정하고 학관 학생들을 숭실대, 중앙대 등에 편입생으로 등록금을 부담해서 보내야 했다. 학관 학생들은 불평이 충만했다. 그뿐 아니라 대전 시민들도 대학에 실망했다고 말했다. 미국 본토의 작은 문리과대학을 그대로 옮겨 오정골에 학교를 세운다고 해서 지방민들은 땅을 사는데도 협조했다. 또 미국의 교육 제도를 그대로 가져와 자녀들을 가르친다고 해서 시민들은 환호했는데 결국 개교하고 보니 세례교인만 입학시켜 자기네와는 관계도 없는 대학을 만들었다는 것이었다. 

1959년에 인가를 받은 대전대학은 수·물과를 하나 증설해서 입학정원 120명의 대학으로 시작했다. 나는 이런 대전대학에 1963년 3학년으로 편입했다. 내가 들어간 수·물과는 학생이 네 명인데 소속 교수는 5명이나 되었다. 그래서 한 사람이라도 수업에 빠지면 1/4이 빠지게 되어 수업에 빠질 수가 없는 곳이었다. 그런 데다 한 사람은 성적 장학금, 또 한 사람은 실험 조교로 일하고 있어 등록금을 제대로 내고 다니는 학생은 두 사람뿐이었다. 이 대학은 학생 수에 연연하지 않고 어떻게 기독교 세계관으로 세상에 나가 섬길 지도자를 기를 것인가에 전념하고 있는 대학이었다.

오승재 장로 

•소설가

•한남대학교 명예교수

•오정교회

공유하기

Comments are clos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