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주의 강단] 삼손 신드롬(2) – 중독 <사사기 1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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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퐁스 도데」의 단편 소설 중에 『고셰 신부의 불로장생주』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가난을 미덕으로 삼았던 프레몽트르 수도원의 재정은 바닥나고, 종을 살 돈이 없어 기도 시간을 나무로 만든 종을 쳐 알렸습니다. 어떻게 하면 수도원을 살릴 수 있을까 연구하던 중 ‘고셰’라는 수도사가 여러 가지 약초를 제조해서 불로장생주를 만듭니다. 그 술이 프랑스 전역에 날개 돋친 듯 팔리게 되자 수도원은 생기를 되찾고, 경제적 풍요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고셰는 이로 인해 어느덧 신부의 서품까지 받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저녁 신부님들이 모여 미사를 드리는데 누군가가 소리를 지르며 혀 꼬부라진 소리를 하며 예배당으로 들어왔습니다. 다름 아닌 고셰 신부였습니다. 그는 불로장생주를 만들기 위해 시음하다가 알코올 중독이 된 것입니다. 좋은 마음으로 시작하여도 중독의 위험에 벗어날 수 없음을 보여줍니다. 아무리 신부라고 해도 중독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중독(Addiction)’의 어원은 라틴어 ‘Addicene’입니다. 고대 사회에서 감금되거나 노예가 된 사람을 묘사하는 데 사용되었던 단어입니다. 무엇인가에 중독되었다는 말은 ‘그 대상에게 몸과 마음이 감금되어 노예의 상태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혼자의 힘으로 빠져나올 수 없는 상태가 됩니다. 

삼손이 반복적으로 블레셋을 찾아 갑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삼손이 틈을 타서 블레셋 사람을 치려 함이었다”(삿 14:4)는 말씀을 통해 블레셋과의 전투를 준비하기 위함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좋은 동기에서 시작했으나 블레셋의 여인들, 블레셋 문화에 중독되는 삼손의 모습을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원문을 보면 주어가 ‘인칭 대명사’ 즉 ‘그’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다른 성경들에서는 주어를 ‘삼손’이 아니라 ‘하나님’으로 기록하여 의미가 변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삼손은 자신의 정욕과 소견에 좋은 대로 행동하지만, 그럼에도 하나님은 그것을 통해서 선하신 뜻을 이루신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인도하심 속에서도 삼손은 자기 부모의 합당한 충고를 듣지 않습니다. 결국은 자기 생각대로,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딤나에 있는 블레셋 여인과 결혼합니다. 16장에서는 블레셋의 가사에 가서 몸을 파는 여자와 함께 하고, 들릴라에게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합니다. 삼손은 계속해서 이스라엘의 원수인 블레셋 여자들의 꽁무니만 쫓고, 사사로서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중독은 그 자체로도 좋지 않지만, 사실 제2의 죄를 짓게 합니다. 사람은 자기가 만든 마지노선이 조금 허물어지면 남아있는 많은 경계가 너무나도 쉽게 무너집니다. 삼손은 태어나면서부터 나실인이 되어 구분된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사사기 14장부터 등장하는 삼손의 모습은 자신의 정체성, 사명, 경건의 모습 그 어떤 것도 발견할 수 없는 세상에 중독된 한 사람의 모습 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그런 삼손에게 최후까지 조언하거나 충고해주는 사람이 등장하지 않는 것입니다.

제가 아는 한 청년이 상담을 요청했습니다. 고민의 내용은 ‘야한 동영상’을 끊지를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금식도 하고 기도도 하지만 며칠 지나면 또 보고 싶다는 것입니다. 너무 고통스럽고 자신의 그런 모습이 수치스러워서 교회에 오기도 부끄럽고 힘이 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지 말자 하지만 다시 영상을 찾게 되는 자신을 발견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그 사람뿐인가요? 많은 사람이 그럴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고민을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에서 희망이 있고 감사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혹시 자신이 어떤 중독의 늪에 빠져들고 있다면,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은 우리의 인도자이며 상담자이신 주님께 의논하며 자신의 모습을 살피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요?

김한호 목사

<춘천동부교회 위임목사·서울장신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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