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 믿음으로 한국 땅에 뛰어든 배위량 목사 (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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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위량의 제2차 순회 전도 여행 (73)

구미에서 상주까지 (21)
탁지일이 번역한 일기의 원본인 에는 ‘낙동’이 ‘Naktong’으로 상주는 ‘Sangjoo’로 표기된다. 그런데 이상규가 번역한 <『숭실의 설립자. Dairy of William M. Baird 1892.5.18.-1895.4.27. 윌리엄 베어드 선교일기』. 베어드 자료집 2>에서 낙동이 ‘Naktong’이나 ‘Aktong’의 번역어로 사용되고, 상주는 ‘Sung Joo’(2번), Sangjoo’(1번)와 Sang Joo’(1번)로 표기된다. 이러한 오류가 다른 날에 쓴 일기이거나 오랜 시간이 경과한 날에 쓴 일기라면 그래도 이해가 되는데 같은 날에 쓴 일기이거나 바로 이튿날에 쓴 일기라면 오류라고 치부하기에는 너무 큰 오류이기에 그 원인을 찾아봐야 할 것이다. 그것이 착각이거나, 실수일 수도 있겠지만 같은 날에 이러한 오류가 되풀이 일어난다면 그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러면 이러한 실수나 오류가 배위량에게서 기인된 것인가? 필자의 생각에는 이러한 실수나 오류가 배위량에게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후대적인 오류라고 생각한다.
앞에서 잠깐 언급했듯이 1893년 4월 26일(수요일) 저녁에 낙동에서 쓴 일기에 서상조에 대한 언급이 나오는데, 탁지일이 번역한 배위량의 일기의 원본인 리차드 베어드(Richard H. Baird)가 편집한 윌리엄 베어드의 프로파일(William M. Baird of Korea : A Profile. NP: N.P.)은 배위량이 자신이 살아 있는 동안에 자신의 제 2차 순회전도 여행 일기를 자신이 혹은 다른 사람에게 부탁하여 타자로 쳐서 보관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Poor I4r – Suhl”와 같은 실수가 크지 않아 배위량도, 그리고 그것을 타자를 친 그 사람도 그것을 편집한 리차드 베어드도 그것을 알지 못하고 타자 친 일기를 모아서 책으로 편집하여 책으로 출판한 것이다. 그 책에 “Poor I4r – Suhl”(“서 전도사가 애처로워 보인다.”가 나타난다. 이 일기에서 ‘I4r’는 ‘Mr’의 오타이다. 그런데 이상규가 미국에서 발견한 배위량의 일기에는 ‘I4r’가 ‘Mr’로 수정되어 있다. 만약 배위량이 1893년 4월 26일 낙동에서 타자기로 쳐서 일기를 썼다면 ‘Mr’를 ‘I4r’로 타자 치는 실수를 범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필자의 생각은 이렇다. 배위량은 제 2차 순회전도 여행에서 손으로 일기를 썼을 것이다. 그런데 그의 일기체가 확실하지 않아 배위량의 일기를 나중에 어떤 사람이 타자를 치면서 배위량이 쓴 일기가 날려서 썼거나, 쓴 일기의 글씨체가 마모가 심하여 글의 뜻을 확실하게 알 수 없어 ‘Mr’를 ‘I4r’로 타자 치는 실수를 했을 수도 있다. 그런데 그 실수는 은연 중에 일어난 실수이기에 배위량의 일기를 두 번째 판서한 그 어떤 사람이 배위량이 손으로 쓴 원본 일기와 그것을 타자로 쳐 둔 일기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고 판단된다. 그것은 두 번째 일기 판서자는 배위량의 원본 일기나 첫 번째 배위량이 제2차 전도 여행을 하면서 손으로 쓴 원본 일기를 타자로 쳐서 보관한 일기 즉 리처드 베어드의 William M. Baird of Korea : A Profile (NP: N.P.)의 존재를 이미 알고 있었고 그것의 수정을 시도한 여러 정황을 볼 수 있다. 그것은 ‘I4r’를 ‘Mr’로 수정을 시도하는 데서 그런 정황을 예측할 수 있을 것이고, 4월 26일 낙동에서 쓴 일기에 1946년 8월 15일 이후에 사용된 한국의 수도를 ‘서울’로 지칭한데서 그 일기가 후대에 배위량의 일기를 손으로 정서했거나 편집을 했다고 유추할 수 있을 것이다.
리차드 베어드가 편집한 배위량의 일기가 먼저 출판지와 출판 일자가 미정인 와 1968년에 출판된 이 있다. 는 타자를 치고 묶는 수준의 책이고 은 타자를 쳐서 묶은 를 책으로 출판한 것이다. 김인수나 탁지일은 출판된 을 번역했다. 김인수는 대부분을 번역했지만, 미국에서 출판된 책 그대로 번역하지 않고 번역하면서 나름대로 편집하여 출판했다. 탁지일은 배위량의 부산 생활을 중심으로 취사선택하여 배위량의 선교의 일부분만 번역했다.

이상규는 미국에서 배위량의 손으로 쓴 일기를 찾아 그것을 복사하여 한국으로 가져와 그것을 모두 번역하여 한국에 소개하는 큰 업적을 남겼다. 이상규의 이러한 헌신은 한국교회사와 초기 한국 선교를 이해하고 연구하는데 엄청난 공헌을 했다. 교회사에 문외한인 필자가 부족하지만 여러 가지 배위량의 일기를 비교하고 대조하면서 그 시대를 더듬어 보면서 이러한 글을 쓸 수 있는 것은 이상규가 헌신을 통하여 만든 큰 도움을 통해 가능하다. 번역은 새로운 창작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쉽지 않는 일이다. 때때로 필자의 시각으로 이상규의 번역이 이렇게 되었으면 좋겠다 또는 그의 이해가 이렇게 되면 좋겠다는 필자의 주장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필자의 시각이다.
필자는 배위량의 순회전도 현장을 직접 찾아 걸으면서 현장 답사를 하고 현장을 고증한 후 필자의 시각에서 이러한 것이 맞다고 생각하고 주장한다. 그렇지만 필자는 이상규, 김인수, 탁지일 그리고 교회사가들과 선교학자들 중에 들지 못하고 제일 마지막에 서 있기도 부족한 사람이다. 그것은 필자는 성서신학자이지 교회사나 선교학자가 아닐 뿐만 아니라, 교회사와 선교학에 단지 작은 관심이 있었고 배위량이란 한 인물을 좋아하여 공부하고 글을 쓰고 그가 순회전도한 길을 찾아 걸으면 그의 발자취를 찾고자 하는 자일뿐이라는 데 있다. 필자의 이런 작은 작업과 연구를 디딤돌 삼아 후일에 매우 중요한 학자가 나타나 배위량의 생애를 새롭게 조명하고 과학적이고, 역사적인 관점에서 더욱 정확하고 정교한 배위량의 생애를 정립하고 그의 사상과 신학을 정립할 수 있는 날이 온다면 이상규는 아마도 연구자들의 제일 첫줄에 서게 될 것이다. 그때 필자를 제일 꼬리에 세워 주기라도 한다면 너무 큰 영광이겠지만, 그런 기회가 없다한들 필자에게는 섭섭할 일이 아닐 것 같다. 그것은 “내가 한 일은 별로 없고 단지 좋아서 한 일”이기 때문이다.
때때로 필자는 눈 오고 바람 불고 비오는 날에도 배위량 순례 길을 나섰다. 무더위와 여름 장마에도 계획한 길을 걷기 위해 길을 나섰고 계획했던 길을 걷기 위하여 밤 12시가 넘은 시간에도 길을 걸어야 했던 적도 있다. 앞도 뒤도 보이지 않는 산골짜기에서 길을 잃고 헤맨 적도 많다. 가져온 플래시의 건전지가 다 방전되고 핸드폰 배터리도 다 방전되어 그야말로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가 된 적도 있었다. 온 사방 천지에 불빛 한 점 없는 한밤중에 어둠만 가득한 산골에서 부를 수 있는 노래는 찬송뿐이었고, 기도밖에 없었다.
그런 상황을 누구라도 상정할 수 밖에 없는 것이 모든 인간의 삶의 과정이다. 그런데도 필자를 그렇게 나서게 했고 걷게 만든 힘이 무엇일까? 순간순간 내가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와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할 때 마음이 먹먹해지고 감격하게 된다.
하나님은 인간의 부족함과 연약한 부분까지 선용하셔서 하나님을 위해 살게 하신다.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이고 섭리고 뜻이 아닐까!

배재욱 교수
<영남신학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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