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리더] 성공 신화의 오류(誤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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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우리나라는 성공할 수 있는 기회가 사라진 사회다. 요즘은 개천에서 용이 나지 않는다. 아니 애당초 개천에서 용이 난다는 발상 자체도 틀렸다. 좁은 도랑에서 용이 나기를 바라는 것 자체나 용이 되지 못했다고 자신을 탓하기엔 세상이 그리 ‘공정’하지 않다. 비단 젊은이들만 그런 생각을 하는 게 아니다. 갈수록 커지는 소득 불평등과 줄어드는 일자리는 탈출구가 없다. 용은 넓고 넓은 바다에서 나온다. 용이 승천하려면 구름이 끼고 비가 내려야 한다. 쨍쨍한 날씨에 용이 되어 승천한 예가 없다. 역시 기회를 얻지 못하면 제아무리 영웅호걸이라도 별 수 없다. 본인의 의지와 노력, 유능한 조력자, 절호의 기회라는 삼박자가 맞아야 그나마 연못에 갇힌 용이 비로소 하늘을 날 수 있다. 누구나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다면 이야기는 이제 전설이 되었다. 정말 우리의 미래는 암울한 것인가. 서울의 경우 열 집 중 세 집이 ‘1인 가구’로 위기 대처의 어려움과 외로움, 경제적 불안감을 안고 산다. 이런 사회를 보며 어떤 지도자도 ‘미래’를 이야기하는 지도자가 없다. 언제부터인가 미래에 대한 이야기가 사라졌다.

스타트업(Start-ups) 업계에서는 실패를 ‘명예의 훈장’ 또는 ‘수업료’로, 기업가라면 누구나 거쳐야 하는 통과의례로 얘기하기 일쑤다. 그러나 실패한 창업자들을 만나보면 분노, 죄책감, 슬픔 등 날 것의 감정들이 고스란히 묻어난다. 실패는 인간관계도 망가뜨리고 경제와 사회에서도 부정적인 영향을 준다. 이렇듯 사람들은 일의 성취를 자신의 능력에 의한 것으로 착각한다. 어찌보면 우리의 크거나 작은 성취는 수없이 많은 변수들이 눈에 띄지 않는 합종연횡 결과인 동시에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 안에서 일어나는 사건이다. 꼭 교회만이 그런 것은 아니다. 사업이나 일터의 세상만사가 그렇다. 관계된 조건들이 제대로 들어맞을 때 일정한 성취가 일어난다. 한 가지 요인만으로 단정하고 설명하기엔 충분하지 않다. 세상 만사가 그렇다.

살다보면 힘든 일이 생긴다. 신앙심이 깊다고 결코 예외는 아니다. 오히려 신앙을 가진 사람에게도 시련이 꼭 필요하다. 그것이 없으면 ‘신앙과 삶’의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하며 살 수 없기 때문이다. 시련을 만났을 때 하나님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고, 자신의 신앙도 다시 점검하게 된다. 그리고 때로는 질문하기도 한다. “도대체 어떻게 된 것입니까? 우리의 땀과 눈물과 노력이 헛된 것입니까?” 하고 묻게 된다. 믿음이 없어서 그런 질문을 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있기 때문에 그런 질문을 하게 된다. 그런 질문을 통해서 하나님과의 진지한 대화, 진국의 대화가 오고간다.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사람들은 점차 진국이 되어 간다.

이런 성공이나 권력은 아주 많은 변수들의 합산이다. 눈에 띄지 않는 요인들의 합종연횡의 결과로 주어졌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항상 상대적이다. 이런 사실을 인식하지 못할 때, 그저 자신의 능력으로 얻은 것인 양 우쭐대다 결국 교만하여 넘어진다. 이런 사람이 맞게 될 파국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문제는 사람이 파국을 맞기 전이나 파국을 맞으면, 주변 여러 사람들이 불안하게 되고 불행케 한다. 사람이 가진 권력이 크면 클수록 사람들이 경험하게 될 불안과 불행도 커지게 된다. 그래서 시련은 사람을 진지하게 만든다. 절제하게 만든다. 시련 속에서 진지하게 사는 법을 배울 수 있다면, 시련을 통해 우리를 빚어 가시는 그 손길을 바라볼 수 있다면. 천하의 주객 이태백은 물 위에 뜬 달을 잡으려고 뛰어들었다가 빠져 죽었다는데, 지어낸 이야기겠지만 이태백이 그렇게 어리석었던 건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술이 웬수인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오만, 짧은 순간에 맛보는 그 권력의 황홀함. 그리고 죽음이란 대가. 사람의 혼을 빼앗아 스스로 죽음의 길로 걸어가게 하는 그 미지의 유혹(템프테이션:temptation)을 이기는 힘이 ‘균형’과 ‘절제’가 아닐까.

이효상 목사 (근대문화진흥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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