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돌아 본 삶의 현장] EW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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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문화센터(East West Center)의 장학금은 나에게 부자 나라의 낯선 생활에 눈을 뜨게 했다. 그리고 내가 밀착해 살던 땅에서 처음으로 고공에 떠올라 우리나라를 객관적으로 내려다보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그뿐 아니라 그때까지는 기독교 학교에서 신자들에 둘러싸여 닫힌 사회에서 생활하고 훈련을 받다가 이제는 열린 불신 사회로 나아가 기독교인으로 홀로 서는 훈련을 하는 때를 맞았다.
이 동서문화센터는 그 정식 명칭이 동서 간의 문화및기술교류센터(The Center for Cultural and Technical Interchange between East and West)라는 긴 이름인데 이를 약해서 EWC라고 부르고 있었다. 1960년에 설립되어 미국과 아·태(아시아·태평양) 지역 학자, 학생 및 훈련생들에게 장학금을 주어 미국과 아·태지역 나라 간의 상호관계와 이해를 증진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었다. EWC는 매년 미국과 40여 아·태 지역에서 2,000여 명의 학생, 훈련생, 학자들을 동서의 중간 지점인 하와이라는 섬을 택해 한 어항 속에 집어넣고 서로 몸을 비비며 살게 한 것이 특징이었다. 하와이 대학은 모여든 장학생들에게 학문을 가르치고 특히 미국과 아·태 지역의 문제들, 즉 통신문제, 문화문제, 식량문제, 인구문제, 그리고 동서기술개발문제 등을 서로 토론하여 EWC가 문제해결의 장이 되게 한다는 목표를 갖고 있었다. 따라서 각 나라 학생들과 교제하며 그 나라의 문화에 친숙해지며 문화적 차이를 해소하도록 학생들에게 왕복여비, 학비, 책값, 기숙사비, 그리고 매월 생활비로 $150을 주고 있었다. 이것은 풍성한 장학금이었다. 당시 우리나라의 1인당 국민 소득은 $125이었고 미국은 $3,846일 때였다.
1966년 6월 14일 처음으로 비행기라는 것을 타보았다. 비행기로는 제주도 여행도 안 해본 때였다. 그때는 외국 여행이라는 것이 드물어 한 사람만 미국을 가도 한 무리의 환송객이 공항에 나와 찬송가(우리 다시 만날 때까지…)를 부르고 환송 기도를 하곤 하던 때였다. 미국을 가는 사람이 그렇게 적었다. 그뿐 아니라 절차가 얼마나 복잡하고 어려웠는지 절차에 수개월이 걸렸고 또 다 된 것으로 알고 거창한 송별 파티를 여러 번 하고 난 뒤도 비자가 나오지 않아 못 가는 사람도 많던 때였다. 그러나 이 미국 국무성 초청의 여행 비자는 전혀 어려움이 없었다. 한 가지 어려움이 있었다면 공용 비자여서 외국을 갔다가 돌아오지 않으면 보조했던 모든 비용을 책임지겠다는 재정 보증이었는데 내 경우는 대학 때 가정교사로 있었던 가정에서 쾌히 승낙해 주어 아무 문제가 없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면 모든 일이 쉬웠다. 그러나 아내도 학교도 또 동료 교수들도 모두 고생을 하고 있는데 나만 특별히 뽑힌 것이 미안할 정도였다.
동경에서 6시간을 지체하고 다른 비행기로 옮겨 탔는데 나는 외톨이였고 첫 비행기 여행이었기 때문이었는지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 기내에서 계속 무엇인가 먹을 걸 주고 있었다. 식사 시간에 웨이트리스가 포도주 병을 들고 기내를 돌며 내 옆자리 친구에게 백포도주를 따랐다. 그러면서 나는 어떻게 하겠느냐고 물었다. 향긋한 술 냄새가 코를 찔렀다. 오랜만의 냄새였다. 나도 똑같은 것으로 달라고 말했다. 이것이 내가 다시 술을 입에 대기 시작한 첫 사건이었다. 또 그때에는 기내에서 면세품을 팔면서 세 가치가 든 담배를 선물로 나누어주고 다녔었다. 나는 이 담배를 피워 물었다. 양담배란 국내에서는 사장족이나 집에서 몰래 피던 사치품이었다. 나는 공개적으로 그 맛을 음미해볼 셈이었다. 처음에는 약간 어지러웠으나 이내 옛날의 느낌으로 되돌아왔다. 이렇게 해서 다시 담배를 입에 대기 시작했다. 못된 버릇은 잠복기가 있어 그 증상이 곧 밖으로 드러나는 모양이었다. 나는 한순간에 불신 세계에 동화되고 있었다.

오승재 장로
•소설가
•한남대학교 명예교수
•오정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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