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교회 문제 사회법으로 가지 말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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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역사 2천 년, 교회는 역사의 거친 파도와 풍랑 속에서 삐걱거리고 상하(上下)와 좌우(左右)로 요동을 치기도 했다. 교파가 다르다는 이유로 서로 증오하고 미워하며 전쟁을 하며 죽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갈 길을 찾아갔다.
개혁 신앙을 가진 사람은 선민의식을 가지고 있다. 창세 전에 믿는 자로 예정되었고 구원받을 자로 택함을 받았다는 신앙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믿는 자는 세상에 살고 있으나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 우리가 잘나서, 우리가 의롭고 선해서, 구원받을 만한 가치가 있어서가 결코 아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음이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사함을 받은 것이다. 의롭다고 받아 들여 주신 것이다. 세상에 비천한 자, 멸시 받는 자, 약한 자들, 없는 자들을 택하여 부귀한 자, 높은 자, 강한 자,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는 하나님이시다.
1960년대에 런던에서 여러 종교학자들이 모여 회의를 했다. 기독교의 신학자들이 모여 기독교를 한 단어로 표현하면 무엇일까? 하는 토론이 벌어졌다. 사랑, 자비, 긍휼, 인자, 십자가 등 여러 의견이 나왔다. 결론을 내지 못 했다. C.S.루이스에게 물었다. 루이스의 간단 명쾌한 대답이다. “은혜 아닙니까!” 그렇다 우리 기독교는 은혜의 종교다. 교회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단어 중의 하나가 은혜이다. 그러나 우리는 은혜를 말하면서도 율법주의의 노예가 되어 살고 있다. 율법은 죄를 깨달으며 지키려고 노력하면서 성화를 이루어 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러나 율법으로는 의롭게 될 수도 없고 구원도 받을 수 없다. 우리는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다. 행위로 되는 것이면 은혜가 은혜가 아니게 된다.
사랑을 얘기하면서 증오를 마음에 품고 산다. 교회 안에서 생겨나는 문제를 자체에서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다. 노회나 총회에서조차 답을 얻지 못하고 세상 법정으로 가져가는 안타까운 현실이다. 그 법적 분쟁이 수만 건에 이르고 있다. 참으로 부끄럽고 치욕스러운 일이다. “구태여 불의한 자들 앞에서 고발하고 성도 앞에서 하지 아니하느냐? 성도가 세상을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 하느냐? 세상도 너희에게 판단을 받겠거든 지극히 작은 일 판단하기를 감당하지 못 하겠느냐?”
오늘 날 교회는, 오늘의 교회 지도자들은 신앙의 몸통마저 내던지고 있다. 겸손도 없고 시비(是非)가 없는 무서운 교회, 살벌한 교회가 되었다. 교인 수가 감소하고 있다. 젊은이들이 교회를 떠나고 있다. 사회에서 교회를 향해 손가락질을 하며 비난한다. 온 교회여! 정신을 똑바로 차리자. 교회 지도자들이여! 하나님 앞에서 두려워 할 줄을 알자!
내 탓은 아니고 다 너의 탓이라고 한다. 웃는 얼굴 뒤에 숨어 있는 비열한 영혼이다. 목사, 장로가 먼저 변하고 하나님의 공의 앞에 서야 한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종이 된 것은 내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값없이 아무 조건 없이 받았다. 이것을 진실로 믿는다면 우리가 변화되어야 맞다. 그것이 마땅하다. 부끄러워해야 옳다. 하나님의 공의가 강같이 흐르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며 기도한다.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고백한다면 변해야 한다. 우선 한국교회의 목사, 장로들이 세상 법원에 고소, 고발한 사건들을 당장 취하하기를 바란다. 그리고 아무리 힘들고 고통스러워도 다시는 교회 일을 세상 법정으로 가지고 가지 말아야 한다. 만일 가져가는 목사, 장로가 있다면 그런 자는 교회에서 부끄러운 자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는 자로 평가 받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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