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이슈] 달란트대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사람들 (304) 소다 가이치 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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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 기자들은 면담을 요청하고 “반생 동안 한국 고아의 아버지, 한국 영주권을 가진 소다 옹, 조국 전도를 위해 귀국”이란 제호로 기사를 썼다. 기자의 질문에 대하여 소다 옹은 “나의 신조는 빌립보서 1장 29절이다.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믿을 특권뿐만 아니라 그분을 위해서 고난까지 당하는 특권, 곧 그리스도를 섬기는 특권을 받았습니다.” “지금 한국인들은 광복의 기쁨으로 가득 차 있다. 나는 일·한 친선이 반드시 이루어질 줄로 믿는다. 경성은 쌀 7작, 외미 1홉 3작, 그 밖의 분유의 배급이 보장되어 온 거리가 활기를 띠고 있다. 경성에는 한국인과 결혼한 일본 여성이 7-8백 명 있다. 나는 이승만 씨와 만났을 때 재일 한국인 60만에 관하여 일본인들이 조금 더 올바른 이해가 있기를 바란다는 말을 들었다. 나는 장차 한국인들과 같이 있기를 원한다.”

그는 일본 전국을 걸어서 전도했다. 원자탄의 폐허 히로시마(廣道)를 비롯하여 규슈(九州)로부터 홋카이도에 이르기까지 “오 하나님, 인류가 범한 죄를 용서하여 주소서”라고 기도하였다. 어떤 때는 폐렴으로 죽을 뻔하고, 어떤 때는 도적을 만나고, 어떤 때는 자동차에 치어 구사일생으로 살았다. 그는 전국으로 <세계평화> 행진을 계속했다. 

1950년 1월 14일 서울 고아원에서 소다의 부인 우에노 다끼 여사가 별세하여 한국사회사업연합회 주관으로 장례식을 거행했다. 부인의 부음을 듣자 그는 슬퍼하기보다 도리어 찬송과 감사로 하나님의 가호를 빌었다. 그리고 자기 부인을 세브란스병원에 입원시켜 준 김명선 박사 등 신앙의 형제들에게 감사를 전했다. 소다 옹은 히브리서 11장 4절의 “그는 믿음으로 죽은 후에도 여전히 말을 하고 있습니다.”를 가지고 “그녀는 훌륭한 신앙을 가지고 봉사의 생애를 마쳤습니다. 그녀는 하늘나라에서 아니 그녀의 영혼은 늙은 남편과 같이 여행하면서 힘이 되어 줄 것이라 믿습니다. 그녀는 이 늙은이 대신 한국 땅에 묻혔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10년이 지났다. 소다는 항상 아내가 묻혀 있는 한국 땅으로 돌아오기를 간절히 원한다고 여러 번 말했다. 1960년 1월 1일 아사히신문(朝日新聞)은 “한국 대통령 이승만의 오랜 친구인 소다 가이치 옹이 한국 귀환을 열망한다.”는 기사를 대서특필했다. 이 기사를 서울에 있는 AP통신이 한국 신문에 다시 보도했다. 당시는 한일 국교정상화가 되기 전이라 소다 선생이 한국에 온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소다는 제2의 고향인 한국에서 여생을 보내고 싶어 하였다. 1961년 3월 11일 가마쿠라보육원의 후신인 영락보린 원 원장 한경직 목사께서 정부와 교섭한 후 초청하여 아사히신문사의 特別機 編으로 오사카공항을 출발하여 김포공항에 도착했다. 

1961년 5월 6일 소다 옹이 김포공항에 도착했을 때 그의 오랜 信仰의 同志 韓景職 牧師, NCC 吉鎭京 牧師, 金禹鉉 牧師, YMCA의 옛 친구 이명원 선생, 이인영 선생, YMCA 협동총무 Baker, 全澤鳧 등이 늙은 믿음의 영웅을 환영했다. 그때 나이 94세였다. 그는 영락보린원에서 어린 고아들과 조용히 함께 살았다. 한국에 온지 1년도 채 되지 않은 1962년 3월 28일에 소다 가이치 선생은 영락보린원에서 생을 마쳤다. 한국 정부는 1962년 4월 28일 일본인으로는 처음으로 文化勳章을 追敍했다. 한국에는 국민문화 向上과 국가발전에 기여한 공로가 뚜렷한 사람에게 수여하는 훈장이 문화훈장이다.

이승하 목사<해방교회 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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