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 믿음으로 한국 땅에 뛰어든 배위량 목사 (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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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미에서 상주까지 (33)

송천교회가 여기서 왜 나오느냐고 하는 독자들도 있겠지만, 배위량의 일기에 나타나는 김서방을 알기 위해서는 김천송천교회가 필히 언급되어야 하기에 여기서 잠깐 송천교회를 언급하고자 한다. 

“俆景祚의 傳導와 松川敎會 設立歷史”를 서경조가 쓴 것을 보면 송천교회는 배위량과 경상도 내륙 지역을 순회 전도한 제2차 배위량 순회전도 여행을 했던 서경조와 어떤 연관이 있다. 그리고 송천교회의 담당 교역자로 김기원이란 분이 일했기에 송천교회를 살펴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김기원은 김재수(金在洙)로 불린 인물로 안의와와 함께 대구제일교회에서 활동하면서 선교에 힘을 쏟았고, 부해리 선교사와도 함께 선교 활동에 참여하였다. 그리고 송천교회에서는 1902년부터 1909년까지 조사(助事)로서 교회를 섬겼다.    

서경조가 “디명은 미상하나 부산서 믿기로 작정한 일인을 찾으니 성명은 김기원이라. 죵쳐병이 즁한 것을 보고 위로를 하고 섭섭히 떠나니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만약 그 김서방이 김재수와 동일인이라면 대구제일교회에 안의와와 함께 들어와 안의와의 조사가 되어 대구 선교를 위해 힘을 쏟은 그 김재수임이 틀림없다. 

배위량의 일기에 보면 1893년 4월 27일 목요일 오전에 낙동을 출발하여 상주를 향하여 가다가 먼저 김재수가 살던 곳을 들렀던 것 같다. “우리는 어제 오전에 낙동을 출발하였다. 상주까지 반쯤 왔을 때, 우리는 김서방이 한 작은 마을의 길가 근처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탁지일은 그 김서방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지만, 그 김서방이 병 때문에 부산을 찾아 왔고 그곳에서 병을 치료한 환자였고 배위량이 부산에서 설립한 사랑방에서 전도를 받았을 것으로 추측한다. 탁지일의 이러한 추측은 일리가 있다고 본다. 일면식도 없는 사람을 만리타향에서 찾아 가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이다. 만약 김재수가 배위량이 일했던 부산으로 갔다가 그곳에서 배위량의 선교 터전인 사랑방에서 그와 대면했다면 배위량이 당연히 그를 찾아 갔을 것이다. 

그런데 서경조가 “디명은 미상하나 부산서 믿기로 작정한 일인을 찾으니 성명은 김기원이라. 죵쳐병이 즁한 것을 보고 위로를 하고 섭섭히 떠나니라.”고 기록한 것과 김기원이란 이름과 김재수란 이름이 많은 어려움을 내재하고 있다.  

이상규는 낙동에서 상주로 향하는 길에서 배위량이 찾은 그 김서방이 “김기원(金基源, ?-1941)이었음이 분명하다.”고 하면서 서경조가 쓴 “俆景祚의 傳導와 松川敎會 設立歷史”, 93-94에서 쓴 “디명은 미상하나 부산서 믿기로 작정한 일인을 찾으니 성명은 김기원이라. 죵쳐병이 즁한 것을 보고 위로를 하고 섭섭히 떠나니라.”란 언급을 인용한다. 배위량의 제 2차 순회전도 여행에서 조수로 함께 참여한 서경조는 배위량이 말하는 소식에 없는 중요한 내용을 기술하고 있다. 서경조가 전하는 중요한 정보는 아래와 같다.

1. 디명은 미상하나, –> 지명(地名)은 잘 알지 못하지만,

2. 부산서 믿기로 작정한 일인

3. 성명은 김기원이라. 

4. 죵쳐병이 즁한 것을 보고(죵쳐병은 아마도 종기의 일종인 병), 

5. 위로를 하고 섭섭히 떠나니라.

그때 서경조는 김서방이 어디서 사는 지를 잘몰랐지만, 낙동에서 상주가는 어느 길목에 있다는 것을 기억했을 것이고 배위량에게 그 김서방을 만나고 가길 권했을 수도 있다. 아니면 낙동에서 상주로 갈 때는 알았지만, 시간이 흘러 “景祚景祚의 傳導와 松川敎會 設立歷史”를 쓸 당시에는 지명을 기억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런데 서경조의 글에 따르면 그 김서방이 부산에서 이미 믿기로 작정한 한 명에 속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김서방의 이름은 김기원이라고 한다. 그 김서방이 김재수이기도 하고 김기원이기도 한 것 같은데, 김재수란 이름과 김기원이란 이름을 둘 다 가지고 있었는지, 아니면 김재수란 이름을 가지고 있다가 나중에 김기원으로 개명을 했는지? 그렇다면 언제 개명을 했는지를 알아야 할 듯하다. 

안의와가 대구로 1897년 봄에 부임할 때 김재수가 안의와의 통역 겸 조수 신분으로 함께 들어왔다. 그것에 대하여 대구제일교회 90년사는 아래와 같이 말한다.

“안의와 선교사가 대구에 정식으로 부임한 것은 1893년 봄이었다. 그때 안의와 목사는 통역 겸 조수였던 김재수 씨와 함께 내구하였다.”

1893년 봄에는 김서방의 이름이 김재수였던 것을 보면 나중에 김기원으로 개명을 한 듯하다. 그런데 김재수(金在洙)가 언제 왜 김기원(金基源)으로 개명을 했는지는 확인하는 것이 쉽지 않다. 이 문제도 교회역사가(敎會歷史家)들이 정리해야 할 문제인 듯하다. 단지 김천송천교회에서 김재수가 1902년부터 1909년까지 조사(助事)로서 교회를 섬겼다. 송천교회 홈페이지 교회의 ‘교회연혁 1901~1949’에 보면 아래와 같다.

“1902.3.1 하송리 239번지 초가 3칸을 13원에 매수 교회당으로 활용 (교역자 : 김기원 조사) […]. 1909년 양성학교 인가(3.18, 교장 : 송병근), 유남순(劉南順) 학교 부지 기금으로 26원 헌금. 교역자: 이재욱 조사”.

송천교회의 교회연혁에 따르면 김재수는 1902-1909년까지 조사로 목회를 했는데, 그 때의 이름은 김재수가 아니라, 김기원이란 이름을 가지고 조사로 활동했음을 알 수 있다. 

배재욱 교수

<영남신학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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