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이슈] 달란트대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사람들 (305) 소다 가이치 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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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다 선생의 장례식은 사회장으로 거행되었다. 1962년 4월 2일 영락보린 원, YMCA를 비롯한 NCC, 한국 사 회복지사업전국연합회, 대한상공회 의소 등 문화, 종교, 교육, 경제 19개 단체가 공동으로 주최하여 국민회당 (국회의사당)에서 2천여 조객이 참석 한 가운데 대광고등학교 밴드의 弔樂 으로 시작되었다. 장례식은 한경직 목 사가 사회하였고, 기도와 성경봉독, 弔辭로는 再建運動 本部長 柳達永, 保社部 長官 鄭熙燮, 서울市長 尹泰 日이 맡았다. 유달영은 “소다 옹의 생 애는 어느 사회사업가보다 우리들에 게 感激과 衝激을 주었다. 소다의 생 애처럼 깨끗한 人類愛와 사랑만이 한 국과 일본이 단합할 수 있다.”고 조사 했다. 유족으로는 조카딸 마스다(曾 田須美子)가 참석하였고 朴正熙 議長 과 日本外相 小坂은 弔花를 보냈다.

墓碑 전면에는 ‘孤兒의 慈父 曾田嘉 伊智 선생의 廟’

앞면에는 <소다 선생은 일본 사람으 로 한국인에게 일생을 바쳤으니 그리 스도의 사랑으로 나타냄이라. 1913년 가마쿠라 보육원을 창설하여 따뜻한 사랑에 자라난 고아 수천이리라. 1919 년 독립운동 시에는 구금된 청년의 구 호에 진력하고 그 후 80세까지 전국을 다니며 복음을 전파하다. 종전 후 일본 으로 건너가 한국에 대한 국민적 참회 를 순회 연설하다. 95세인 5월 다시 한 국에 돌아와 영락보린원에서 1962년 3 월 28일 장서하니 향년 96세라. 동년 4 월 2일 한국 사회단체연합으로 碑를 세우노라.>

묘비 옆면에는 朱要翰 선생이 지은 詩가 새겨져 있다.

“언 손 품어 주고

쓰린 마음 만져 주니

일생을 길다 말고

거룩한 길 걸었어라.

고향이 따로 있든가

마음 둔 곳이어늘”

소다 가이치를 아는 조선인들은 그 를 진실한 기독교인으로 기억하고 복 음을 몸으로 전해주기 위해 일본에서 온 선교사로 받아들였기에 일본인에 대한 구원(舊怨)도 거두고 소다 가이치 와 우에노 다끼의 묘비를 외국 선교사 들의 묘지 양화진에 세워 기리고 있다.

소다 옹이 서거하자 추도식이 일본 에서도 거행되었다. 서거 1개월 후인 4 월 28일 동경 아오야마(靑山)학원 대학 본부 예배당에서 거행되었는데 이것은 일본 NCC, 가마쿠라 보육원, 감리교 회, 재일 한국 YMCA 등 10여 개 단체 공동 주최로 거행되었다.

1964년 2주기 追悼 式은 서울 YMCA 강당에서 거행되었다. 이때는 한·일간 의 국교가 정상화되지 않았으므로 일 본인을 정식 초대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거리에서는 항일 데모가 계 속되었고, 언론에서는 한일 정상화 반 대 전화가 오고, 협박장이 날아들었다. 그러나 YMCA는 “아무리 일본인이라 도 우리 민족에게 은혜를 끼친 사람이 라면 보답하는 것이 도리가 아니겠느 냐?” 하였다.

이승하 목사

<해방교회 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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