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주를 여는 말씀] 어찌하여 내게 이런 고난이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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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 3:11∼26

“어찌하여 내가 태에서 죽어 나오지 아니하였던가 어찌하여 내 어머니가 해산할 때에 내가 숨지지 아니하였던가”(11) “어찌하여 무릎이 나를 받았던가 어찌하여 내가 젖을 빨았던가”(12)

욥은 자기에게 찾아온 고난에 대해 도저히 이해할 수 없어 ‘어찌하여(why is)’를 쏟아내고 있습니다. (16, 20, 23) 고난을 대하는 욥이 처음에는 ‘주신이도 여호와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이시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을 받으실지어다’(1:21) 하고 수용은 물론 감사 찬양까지 했던 욥이며 두 번째 이렇게 살 바에는 죽는 것이 더 낫겠다는 목에 비수를 꽂는 조강지처의 독설에도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을 즉 화도 받지 아니하겠느냐 고백하며 욥이 입으로 범죄하지 않았다고(2:10) 칭찬하고 있지만, 고난의 농도가 깊어지고 길어질 때 어찌하여 내가 고난을 당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음에 탄식을 쏟아놓기 시작한 욥을 봅니다.

욥이 아무리 흠 없이 완벽하게 살았다 해도 인내하기 어려운 고난 앞에 역시 연약한 인간임을 보게 하십니다. 그러나 욥기 전체와 결론을 보았을 때 고난으로 하나님을 향한 정직한 토설이 하나님과 나를 알아가는 데 고난의 유익을 깨우치고 있습니다. “고난 당하는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 다윗의 고백을 생각하게 합니다. 인내가 기독자에게 아름다운 미덕 중에 미덕이지만 그렇다고 무조건 참는 것이 참 신앙이 아니며 그렇다고 고난을 피하려는 약자의 자세가 아닌 고난을 정직하게 대면하며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문제 해결과 정답을 얻을 수 있다 함을 알게 합니다.

평생을 목회자로 갖가지 고난에 처한 수많은 성도에게 위로하며 너무 쉽게 답을 주려고 설교했을 때 성도님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부끄럽습니다. 욥이 격노한 것처럼 위로보다 도리어 화나게 만드는 경우가 되었을 거라 욥을 통해 헤아려 봅니다. 어찌하여(why is)? 정직한 고백으로 때로는 극한 탄식으로 하나님을 찾고 자신을 알아가게 하는 것이 도리어 유익할 것임을 깨우쳐 주십니다. 알면서도 왜 그런 실수를 했는지 생각하면 내 안에 조급함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조급함이 일을 그르치는 경우를 많이 경험했습니다. 

C.S 루이스가 63세에 만혼한 아내를 암으로 사별한 후에 그 참담한 마음을 진솔하게 표현한 ‘헤아려 본 슬픔’이란 책을 통해 고통의 한계를 절감하게 하고 있습니다. “죽음을 너무 쉽게 생각하지 말자. 죽음이 별것 아니라면 출생도 별것 아니라 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주신 대로 순종할 것이나 말씀으로 나를 위로하려면 그만 두라”는 말을 거침없이 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빈 공간을 무엇으로 채울 수 있겠는가. 삶의 언어인 하나님의 말씀을 교리와 신학과 과학의 논리로 풀려고 하는 것은 곧 사단적인 요소라고까지 말하고 있습니다. 정직함으로 고난을 고난으로 직면해야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욥을 비롯한 영성 깊은 신앙의 선배들은 참기 어려운 분노와 슬픔을 담아내는 믿음의 언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탄식을 성경 곳곳에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특별히 시편과 예레미야 애가에 집중되어 있고 예수님이 십자가상에서 쏟아낸 가상칠언이 생생합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하신 주님, 주님을 향한 믿음의 길에는 지름길이 없다 하심을 잊지 않게 하시고 문제 앞에 정면으로 대처하며 정도를 걸어 주님을 닮아가는 자에게 하소서. 고난과 역경의 광야길이 아니더라도 매일의 삶 속에서 주님과 함께 하는 감사의 삶이 되게 하소서. 심장까지 저미는 가시가 나를 사랑하신 주님의 손길이요. 저를 저 되게 만들어 가심을 터득하게 하소서. 

김유수 목사

<광주 월광교회 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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