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이슈] 달란트대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사람들 (306) 소다 가이치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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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유족대표 소다(曾田) 翁의 생질(甥姪)과 일본 전 수상 기시 노부스케(岸信介)는 소다 옹의 고향 사람으로서 소다 옹을 매우 존경했을 뿐만 아니라 친한파 정치인이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자기가 친히 추도식에 참석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피치 못할 사정으로 딸(安部 氏 婦人)과 安部晉太郞  夫妻를 특사로 파송했다.

당시 한일관계는 험악했는데 한일양국에서 함께 존경받았던 소다 옹이 다리가 되어 소통의 물꼬를 틀 수 있었다. 한 사람의 신앙적 위력이 소다 가이치 선생을 통해 나타났다. 

추도식은 한경직 목사의 사회와 박 주병 보건사회부 장관, 윤치영 서울특별시장의 추도사로 거행되었는데 그 광경은 당시 한•일간의 험악한 분위기와는 대조되는 따뜻하고 친밀하게 진행되었다. 

그 뒤 고향 사람인 防長 新聞社 布浦芳郞 社長은 소다(曾田) 翁 追慕式 記事와 <한국방문기>를 연재했는데 “한국인이 일본인을 憎惡하는 데에는 이유가 없는 것 아니다. 무조건적으로 증오하는 것 아님을 이번 소다 옹에 대한 존경심을 통해 알 수 있었다. 평화의 사도였던 소다 옹에 대해서 한국인은 최대의 존경과 성의를 아낌없이 나타내는 모습에 감명 받았다. 일본인은 과거의 罪過를 悔改함과 동시에 올바른 한국관을 가지고 하루라도 빨리 韓日國交 正常化를 성공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고 했다. 

서울특별시 마포구 합정동에 있는 양화진(楊花津)과 그 주변 지역은 역사적으로 많은 史蹟과 事緣이 있다. 이곳이 외국인 묘지로 지정된 것은 1890년 7월 26일 미국 북 장로회 의료선교사로 高宗의 侍醫였던 존 혜론(John W. Heron, 惠論. 1858-1890)이 急患으로 별세하자 묘지문제가 생겼다. 도성 안에 시신 매장은 엄격히 금지되었다. 유족과 선교사들은 조정에 묘지로 적당한 장소를 제공해 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조정에서 지정해 준 곳은 한강 건너편 야산 기슭의 모래밭이어서 묘지로 쓸 수 없는 땅이었다. 

이와 같은 때에 美國公使館과 朝廷의 信任을 받던 알렌과 언더우드 등의 宣敎師들은 外交 經路를 통하여 미국공사를 비롯한 러시아, 영국, 프랑스, 독일 등 5개국 공사의 共同名義로, 양화진을 외국인 공동묘지로 허락해 줄 것을 청원하여 마침내 경관이 아름다운 양화진을 사용하도록 許可(1893년. 10월 24일) 받아 이곳에 혜론 선교사를 처음 안장함으로써 양화진 외국인 공원묘지가 되었다. 

이곳은 구한말과 일제강점기에 우리나라 교육, 의료, 언론 등 발전에 기여하다 제2의 조국인 한국에서 죽어 서울 한강변 양화진에 있는 외국인 선교사 묘원이다. 소다 옹은 미국, 영국,  캐나다, 호주 등지에서 온 서양 선교사들과는 달리 조선에 와서 조선의 초기 개신교 신자인 이상재 선생에게 복음을 받고 힘없고 불쌍한 조선의 고아들을 위해 평생을 바쳐 음지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몸으로 실천하며 살았다. 

이승하 목사<해방교회 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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