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2021, 성탄절을 맞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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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강절(待降節)을 지키고 있다. 인터넷, 카톡이 발달하면서 예전에 성탄카드나 연하엽서로  축복인사를 나누던 풍습이 사라졌다. 눈 덮인 마을, 눈길을 달리던 썰매, 사슴과 다람쥐들이 그려졌던 카드가 그리워진다. 카드 안쪽에는 아기 예수님의 탄생과 하나님의 사랑, 선행과 행복과 따뜻한 정(情)을 담은 글, 축복하는 기도가 쓰여져 있었다.

천사가 나타나 마리아에게 하나님의 은총으로 말미암은 수태고지를 알렸을 때 “주의 계집 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라고 고백한다. 놀란 마음에 가슴이 철렁했을 요셉에게 그의 약혼녀 마리아의 수태에 관해 천사가 일러주는 말을 듣고 자신의 생각을 접는 모습은 참으로 귀한 순명(順命)의 믿음이다. 

마리아는 친척 엘리사벳을 찾아 간다. 엘리사벳은 나이가 많은 여인이었으나 이미 임신한지 여섯달이 되었다. 바로 세례 요한이 출생할 것이다. 세례 요한 출생 여섯 달 후에 구주께서 강생(降生)하셨다. 고요하고 거룩한 밤이었다. 나이 많은 시므온은 성령에 감동되어 성전에 데리고 온 아기를 메시아로 알아보았다. 당시는 폭군 헤롯이 형식상 왕으로 지배하고 있었고 로마제국이 이스라엘을 통치하고 있었다. 이스라엘 백성을 마음대로 처형하고 있었다. 로마의 황제는 아우구스투스였다. 제국은 그를 신으로 선포하고 예배 의식을 제정했다. 제국의 한 구석에서 예수라는 아기가 탄생한 사실은 당대 역사가 누구에게서도 아무런 관심을 끌지 못했다. 헤롯은 처남 둘과 아내 미리암, 자신의 아들 중, 둘을 살해한 사람이었다. 그는 사망하기 5일 전 자신을 싫어하고 비판적인 많은 사람을 체포해 자신이 죽는 날 함께 처형하라는 칙령을 내리기까지 한 포악한 인물이었다. 그래야 자신이 죽은 날 조상(弔喪)하는 분위기가 있을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요셉과 마리아는 아기 예수를 안고 이집트로 피신했다. 헤롯이 죽자 천사가 요셉에게 이스라엘로 돌아가라고 지시했다. 나사렛으로 이주했다. 헤롯의 다른 아들 안디바(안티파스)가 다스리고 있었다. 이 헤롯은 후일 예수님께서 ‘저 여우’라고 부르시게 되는 사람으로 세례 요한을 처형한 폭군이다. 

예수님의 오심으로 새로운 문화가 나타났다. 새로운 세계정신이 출현했다. 겸손이다. 당시까지는 ‘겸손’이라는 말은 사용되지 않았다. 만물을 만드신 분께서 작아지고 또 작아져서 아기 모습으로 구유에 탄생하신 것이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다” 소녀 마리아의 품을 피난처로 삼고 오셨다. 그 소녀에게서 음식과 사랑을 공급받는 연약한 아기로 오셨다. 예수님께서 오시기 전까지 하나님께 접근하는 것은 두려움이었다. 지성소에 함부로 들어갈 수 없었다. 이제 우리가 그분의 겸손함으로 말미암아 가까이 갈 수 있게 되었다. 주님은 ‘비천한 자’로 오셨다. 비천한 자를 위하여 낮아지셨다. 신학적으로 말하면 ‘케노시스(Kenosis)’로 오신 것이다. 신성을 제한하고 자기를 비우신 것이다. 처음도 없고 나중도 없으신 하나님께서 시간과 공간 안으로 들어 오셨다. 목수의 아들로 오시는 데는 용기가 필요했다. 용기는 하나님의 성품 중의 하나가 되신다.

오늘의 한국교회는 진실로 겸손한가? 서로 잘났다고, 나는 깨끗하다고 남을 향해서 손가락질 하고 있지는 않은가? 어찌하여 거룩한 강단 위에서 하나님의 말씀 대신에 남을 비방하고 비판하며 욕설을 퍼붓고 있는가? 왜 분열을 선동하는가? 하나님 앞에 두렵지 않는가? 가난하고 비천한 자가 교회를 찾아오기에 부담 없이 편안한 곳인가? 세상을 향해 용기 있게 다가가고 있는가? 교회를 개혁하기 위한 담대한 용기를 가지고 있는가? 2021년 성탄절을 맞아 모두가 가슴에 손을 얹고 하나님 앞에서 겸손히 통회하며 회개하는 운동이 일어났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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